폴란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이름: 다리우스

강제노동과 질병, 기아로 지친 그들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카스피해의 팔레비 항구에 내린 수천 명의 사람들은 해변에서 무릎을 꿇고 페르시아의 땅에 키스했다.

시베리아를 탈출해 그토록 갈망하던 약속의 땅에서 마침내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Helena Woloch


테헤란에 위치한 둘라브(Dulab) 공동묘지에는 1,892기의 폴란드인 남녀노소가 묻힌 블록이 있다. 사망 날짜는 1942년으로 모두 동일하다.


가끔 폴란드에서 온 편지가 그곳의 부모 또는 친척을 찾는다. 

테헤란 주재 폴란드 대사관은 무덤을 찾아 사진을 찍어 그들에게 보내준다. 시간에 의해 비석의 글자들은 낡아버려 오직 손의 느낌과 상상력의 도움을 빌어 그들을 추정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테헤란 둘라브(Dulab) 공동묘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듯이 비문의 이름은 점점 지워져 간다.


"사라진 꿈"



"대학 동기였던 남자친구와 손을 꼭 잡고 결혼을 꿈꾸고, 피아노를 배우며 최신 유행곡을 흥얼거리고, 가을날 바르샤바 거리를 걸으면 발밑에 사각거리는 낙엽소리를 내일부터는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땐 몰랐죠"

Anna Borkowska


1939년 9월 17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다. 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동유럽의 합의된 지역을 양분하기 위해 폴란드로 진격한 것이다. 이들의 명분은 '독일의 공격으로 무너진 폴란드가 소련 시민인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인들을 더 이상 보호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크림반도 사태 때 발표한 명분과 패턴이 같다)


점령후 몇 개월간 소련은 '사회적으로 위험하고 반소비에트요소'라는 이유를 들어 폴란드 지역의 인종청소를 시작했다. 카틴 숲의 학살로 대표되는 소련군의 만행은 폴란드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약 150만 명의 민간인이 그들의 가정에서 소를 트럭에 싣듯이 강제로 4군데의 집단 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실제로 가축 열차로 시베리아로 수송하였다)

이중 '불순분자(공무원, 교사, 판사, 변호사, 작가등)'로 분류한 50만 명은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감금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 "희망의 등대, 이란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계는 스탈린의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굶주리고 있는 폴란드인 수백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용소의 간수들은 폴란드 재소자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면 "너희들은 영원히 여기 있을 거야"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상황은 그들의 예언과는 달라져갔다.

1941년 여름, 놀라운 소식이 재소자들 사이에 떠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다'


[영화 '마이웨이'의 소련 수용소]


독일이 1941년 러시아를 침공하자 스탈린은 폴란드 재소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대신 '연합군에 의해 조직될 중동연합군에 합류하라'라고 명령한다. 굶주린 폴란드 난민들은 그들의 새로운 군대를 위해 우즈베키스탄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 거리는 소련의 가장 먼 수용소로부터는 수천 Km 이상에 달하였다.


[폴란드 난민]


많은 사람들이 행군 중에 동사하거나 아사하였고, 개인적으로 소지한 물건을 판매하며 생명을 유지할 정도였다.

더 이상 걷기 힘들어진 엄마들은 낯선 이에게 남은 물건을 모두 주고 아이들을 부탁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드디어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임시 육군 캠프에 도착한 폴란드인들은 소련이 식량을 지원한다는 폴란드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기지밖에 진을 쳤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임시로 열악한 난민캠프에 이들을 수용하였는데 문제는 연령과 성별을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배치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질, 장티푸스, 열병이 만연하였고 우즈베키스탄의 공동묘지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무덤이 새로 생겨났다. 스탈린이 폴란드인들을 이란으로 이송하는데 합의함에 따라 이들은 실낱같은 구원의 빛을 보게 된다.


[반다르에팔레비(Bandar-e Pahlavi)항 / 현재: 반다르에안잘리(Bandar-e Anzali)]


중앙아시아로부터 폴란드인들의 이동은 아슈카바드에서 마슈하드까지는 육로를, 크라스노봇스크에서 반다르에팔레비까지는 해로를 잇는 대이동이었다.


1942년 3월 24일~4월 5일 / 8월 10일~30일 사이의 두차례로 진행된 피난에서 11만 5천 명이 대피하였고 그들 중 민간인은 37,000명, 어린이는 18,000명이었다.(소련에 유배된 폴란드인의 7%에 불과한 숫자였다)


[소련 유조선에 탄 폴란드 난민]


1942년 3월 25일까지도 이란과 영국정부는 팔레비항으로 들어오는 소련 유조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태로 실려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도착 몇일전이 되어서야 난민들 중에 민간인과 여성, 어린이들이 포함되었다는것을 전해듣고 소스라치게 놀랄수 밖에 없었다. 배는 초만원이었고 갑판은 물론 사용가능한 모든 공간이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난민들은 넝마를 벗고 이를 떼어내면 해골이나 다름없었다.


[폴란드 난민 어린이들]


수천 명의 폴란드인들은 반다르에팔레비 항에 내리자마자 땅에 키스를 하였고, 해변에 꿇어앉아 기도를 하거나 기뻐서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폴란드인들은 자유를 얻었다.


2,000개의 임시 텐트(이란 군대에서 제공)가 반다르에팔레비 항의 해안선을 따라 새로운 도시처럼 빽빽하게 들어섰다. 목욕탕, 변소, 소독 부스, 세탁실, 숙소, 빵집과 병원텐트가 해안선 양쪽으로 수 킬로미터나 뻗어있었다. 도시의 모든 빈집과 영화관의 의자들을 모두 뜯어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여전히 부족했다.


[현재의 반다르에팔레비 해변에는 난민 텐트가 아닌 피서객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그들이 고통에서 완벽히 탈출한 것은 아니었다.

2년간 수용소에서 기아와 중노동과 질병으로 악화된 몸은 피로, 이질, 말라리아, 장티푸스, 피부괴사, 실명, 부스럼등으로 심각한 상태였다.


난민들을 감독하기 위해 임명된 이란의 에스파디아리 장군은 장티푸스라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폴란드와 영국의 관계자들과 협의해 철조망으로 분리된 '감염영역'과 '안전영역'으로 수용소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수용소에 도착후 전염병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난민들은 나흘동안 격리되거나 병원으로 보내졌다.

입원환자의 40%가 장티푸스를 앓고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도착 후 한두달 이내에 사망했다.


당시 반다르에팔레비 전체를 통틀어 10명의 의사와 25명의 간호사가 전부였던 열악한 의료조건도 문제였다.

2,806명의 난민들이 몇개월 이내에 사망하여 묘지에 안장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속에 어떻게 죽었는지, 언제 죽었는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못해 1942년 사망한것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었다.


안전영역에 들어간 난민들은 우선 옷을 모아 태웠으며 샤워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위생을 이유로 머리를 밀어버렸다. 여성들은 민머리를 감추기 위해 머리수건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적십자로부터 침구와 새옷을 받고나서야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반다르에팔레비의 난민캠프와 현재 모습]


소련 수용소에서의 생활 후유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수용소에서 제공되던 딱딱한 빵 한 조각에 익숙해진 폴란드인들의 위장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그때문에 영국군으로부터 지원된 쇠고기 조림, 기름진 수프와 양고기는 비참한 결과로 나타났다.

그들의 몸 상태를 간과하고 주어진 음식들은 부작용을 일으켰고 많은 수가 과식 혹은 소화불량으로 사망했다.


[반다르에안잘리 묘지에는 639기의 폴란드인 무덤이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란인들은 폴란드인들의 마음을 얻었다.

폴란드 난민들은 비록 음식을 제공했지만 거칠고 차갑게 대한 영국이나 인도 군인들보다는 친절한 미소와 관대한 행동을 보여준 이란 사람들에게 더 감동한 것이다.

당시의 이란도 역사를 돌이켜보면 불행한 순간이었다. 러시아와 영국에 분할 점령된 상태로 조국의 독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의 상황이 남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1942년 4월 11일 테헤란을 방문한 요세프 자야크(Josef Zajac) 망명 폴란드 군 사령관은 '이란인들이 영국인이나 러시아인들보다 훨씬 친절했다'고 일기장에 적고 있다.


요세프 자야크는 이란의 내무장관이었던 아미놀라 자한바니(Aminollah Djahanbani)의 친절하고 따뜻한 대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틀 후 두 사람은 같은 프랑스 군사 학교의 생도였음을 알고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란의 거리에서 폴란드 군인이 이란 장교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 이스파한, 폴란드 어린이들의 도시



"다른 아이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가느다란 팔로 인형같이 조그만 여동생을 단단히 품에 안고 있던 한 소녀에 대한 기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네요"

Krystyna Skwarko


반다르에팔레비에는 폴란드 어린이 18,000명이 도착했다.

전부 고아는 아니었지만 러시아에서 오는 여정 동안 가족과 떨어진 상태였다.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심하게 야위고 영양실조였다. 긴급하게 테헤란과 아바즈에 임시 고아원이 설치되었다.


[고아원의 폴란드 어린이]


1942년 3월 12일, 천주교 수녀에 의해 마슈하드에 최초의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이곳으로 아시가바트에서 트럭으로 국경을 넘어 아이들이 이송되었다.


최종적으로 이스파한이 7세 미만 폴란드인 고아들의 치료와 탁아의 중심지로 선정되었다. 이스파한의 아름답고 쾌적한 자연환경은 아이들의 심신과 건강 회복에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1942년 4월 10일부터 고아들은 이스파한으로 보내지기 시작하였다.


[1943년, 폴란드 걸스카웃 소녀들]


이란의 공공기관과 땅을 소유한 일부 개인은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앞장서서 부지를 비웠다.

고아들을 지원하기 위한 학교와 병원 및 사회단체가 늘어나면서 도시 전체가 빠르게 성장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누렸다.

자비로운 젊은 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는 이스파한의 폴란드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이들을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해 수영장을 이용하게 하거나 식사를 함께 하였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시간이 지나 아이들은 페르시아어를 배우기도 하고, 도시를 방문한 고위 공무원들 앞에서 페르시아시를 암송하는 재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급성장한 도시의 24개 블록은 고아들이 넘쳐났다.

그 결과 이스파한은 '폴란드 어린이들의 도시'로 난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란의 폴란드 난민현황


난민은 며칠부터 최대 몇 개월까지 팔레비에 대기하다 테헤란, 마슈하드 및 아바즈에 있는 캠프로 이송되었다.

그중 테헤란은 최대의 수용소가 있는 도시였고 카스피해로부터 난민 수송 트럭이 지속적으로 도착했다.


테헤란의 5개 난민캠프(민간 캠프 4, 군 캠프 1)는 도시 외곽에 위치했다.

이란의 공공기관은 난민들의 '단독'사용을 위해(심지어 스포츠 경기장과 수영장, 온천까지) 해당 건물을 몽땅 비웠다.

제2캠프 도시 외곽의 텐트촌이었고, 제4캠프 사막에 위치한 군수공장이었다.

제3캠프에는 폴란드인을 위한 병원, 노인 요양소, 고아원(나자렛 수녀원에 의해 운영) 등이 있었는데 이곳은 아름다운 나무와 흐르는 물로 둘러싸인 샤의 개인 정원이었지만 기꺼이 난민들을 위해 내어주었다.

제5캠프 아픈 아이들을 위한 곳으로 셰미란(Shemiran)에 배치되었다.

 

[난민캠프 내부]


군에 입대가 가능한 건강한 남성과 여성은 즉각 입대하기로 하고 군에 배치하였다.

이들은 이란에 짧게 체류하였고 레바논에서 재건 중인 자유 폴란드군 합류하였다.

나머지 여성과 어린이, 입대 나이를 넘긴 남성들은 최대 3년간 이란에 살았다.


[당시를 다룬 다큐 영화 'Lost Requiem']

 

생존과 회복에는 음식과 의복보다 휴머니즘이 필요했다.


폴란드인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갈망은 몇개월만에 도시에 미술관과, 라디오 방송국, 영화관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예술가와 장인이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폴란드 신문과 레스토랑이 개업하기도 하였다. 레스토랑 밖에는 폴란드 국가가 내걸렸다. 3년간 폴란드인들은 학습서적과 소설을 출판하기도 하였고 이는 페르시아어 번역본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난민 여성이 텐트 앞의 폴란드 국장을 장식하고 있다] 


1944년 무렵부터 폴란드 난민들은 탄자니아, 멕시코, 인도, 뉴질랜드, 영국의 다른 수용소로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경로가 이란 남서부의 아바즈(Ahvaz)였는데, 지금까지도 이곳을 'Campolu'라고 하기도 한다. 그 의미는 폴란드 난민캠프(Camp Polonia)를 줄인 말이다.

마슈하드의 마지막 아이가 1944년 6월 10일에 떠났고, 아바즈는 1945년 6월에 수용소를 폐쇄하였다.

이스파한에서는 1945년 10월 12일 레바논으로 마지막 버스가 떠났다.


2차대전 발발이전 페르시아는 영국, 러시아 열강에 맞서 유구한 민족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란으로 국호를 개명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과의 아리안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내외부적 결의를 보여주는 결단이었다. 

독일은 나치당 집권 이후 1차 대전의 결과물 베르사유조약의 폐기를 통해 빼앗긴 권리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단치히의 반환을 거부하는 폴란드의 반발로 독일-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어 영불 연합군의 대독 선전포고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공교롭게도 폴란드, 이란 모두 강대국의 침략에 주권을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착취당하던 폴란드인들은 전쟁의 개시와 함께 대독 전쟁을 지원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영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 중인 이란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전쟁의 피해자인 이란과 폴란드의 아이러니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의 진영논리에 따라 엄밀히 보자면 이란과 폴란드는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란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대립하는 폴란드인들을 소련과 영국보다도 더욱 인간적이고 관대하게 돌봐주었다. 

전쟁에서 피어난 이 에피소드는 이란과 이란인의 희생적인 휴머니즘을 일깨워주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이 사건에 대해 영국과 소련은 애써 침묵으로 은닉하려 하였지만, 어려운 시대를 국경을 초월한 인간애로 서로 의지한 이란과 폴란드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남긴 것들



"친절한 페르시아인들이 버스 주변을 둘러싸고 소리를 지르며 열린 창문을 통해 건포도와 잘익은 석류, 볶은 완두콩등의 선물을 밀어넣어주느라 매우 혼잡했다"

The invited, Krystyna Skwarko


난민캠프가 있던 기간동안 이란에 살았던 사람들의 회고록과 서술에서 폴란드인들의 심경과 당시상황을 엿볼 수 있다. 자신들을 받아준 국가에 망명생활을 하며 느낀 기분과 채무에 대한 감사는 모든 문학전체에 걸쳐 따뜻하게 기억되고 있다.

폴란드인들이 남긴 이란 일반인들의 호의와 동정이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안잘리의 고아원 교사였던 크리스티나 여사는 난민 신분으로의 생활을 다룬 책 '초대(The invited)'에서 당시 이란 사람들의 따뜻함을 묘사하고 있다. 


[크리스티나 여사와 당시를 기록한 책]


심지어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다리우스의 이름은 오늘날 폴란드에서 행해지는 설문조사 때마다 가장 인기 있는 남자아이의 이름 중 하나로 선정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12년에는 테헤란 둘라브 공동묘지에서 '폴란드 난민, 소련 탈출 70주년을 기념 행사'가 열렸다.


"이란 국민들의 큰 도움이 없었다면 더 많은 폴란드인들이 죽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란 국민의 지원에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난민들을 도왔고 이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 폴란드 대표단 얀 치카노브스키(Jan Ciechanowski) 박사


종종 테헤란의 묘지 관리인은 수백 기의 똑같아 보이는 묘지 중 하나에 촛불을 밝혀줄 수 있냐는 부탁의 편지를 폴란드로부터 받는다.

2차 세계대전 중의 한 장면이 테헤란의 가난한 동네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가끔 켜지는 촛불은 가슴 아프게 죽어간 1,892명의 폴란드인 남성, 여성,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기억의 깜빡임이다. 폴란드의 슬프고도 잊혀진 기억들은 이란을 통해서 이렇게 힘겨웠던 발자국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1.Faruqi, Anwar. Forgotten Polish Exodus to Iran. Washington Post. 23 Nov 2000. 

2.Kunert, Andrzej. K., Polacy w Iranie 1942-45. Vol I. R.O.P.W.i M. Warsawa. 2002. 

3.Mironowicz, Anna, Od Hajnowki do Pahlewi. Editions Spotkania. Paris 1986. 

4.Woloch, Helena, Moje Wspomnienia. Sovest. Kotlas 1998. 

5.Forgotten Polish Exodus to Persia. By Anwar Faruqi, Thursday , November 23, 2000 ; Page A45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