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미스월드, 키키 호칸손(Kicki Håkansson)

지금은 미스유니버스와 함께 세계 미인대회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것이 '미스월드(MISS WORLD)'지만 첫 번째 대회는 1951년에 열린 페스티벌 오브 브리튼(영국제)의 일회성 이벤트였다.

그래서 최초 구상된 대회명도 '영국제의 비키니 콘테스트'였으나 국제적 규모의 박람회에 걸맞지 않은 촌스러운 이름이라는 언론의 지적에 '미스월드'라는 거창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51년, 페스티벌 오브 브리튼(Festival of Britain)

페스티벌 오브 브리튼(영국제)은 1951년 5월부터 9월까지 영국 전역에서 개최된 박람회였다. 1947년 영국 정부는 1851년에 열린 대 전람회 10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2차 대전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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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회 창립자인 에릭 몰리(Eric Morley, 1918~2000)는 12개국(미국,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덴마크, 아일랜드, 독일, 핀란드, 스위스, 네덜란드, 터키, 일본)에 초대장을 보냈지만 1950년대에 비키니를 입는 쇼에 출전한다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한 것이어서 초청장을 받은 국가의 출전 포기가 속출했다. 하지만 대회의 규칙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 해외 참가자 - 미국,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

해외 참가자가 5명에 불과하자 본선을 불과 며칠 앞둔 1951년 7월 24일, 영국인 출전자들을 대거 선발하기로 했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미혼여성은 당연하고 기혼여성은 물론 자녀가 있어도 참가를 허용했다.

▲ 영국대표 선발식

선발식 하루 전인 7월 23일 오후, 접수한 30명의 여성중 27명만이 등장했다.(최종 21명 선발)

▲ 영국대표 21인

이날 출전을 포기한 3명은 기혼여성이었는데 남편이 다른 남자들에게 아내가 비키니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 영국대표 시상식에 참여한 미스 스웨덴 키키 호칸손(드레스)

1951년 7월 29일, 런던 라이시엄 극장(Lyceum Theatre)에서 열린 본선 무대에서 스웨덴 출신의 키키 호칸손(Kicki Håkansson)이 최초의 미스월드 왕좌에 올랐다. 1929년 7월 23일생으로 본명은 케르스틴 마르가레타 호칸손(Kerstin Margareta Håkansson)이지만 그녀는 '키키(Kicki)'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 1951 미스월드 대회장

위키백과에는 생일이 6월 17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많은 사이트들이 이를 인용하고 있는데, 런던에 입국한 날(7월 23일) 22세가 되었고 대회 중 생일파티를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7월 23일이 정확한 생일이다.

이날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을 받은 호칸손은 우승하는 순간 비키니 수영복을 착용했는데, 덕분에 육감적인 몸매(신장 170cm, 쓰리사이즈 37-23-36)가 더욱 두드러지면서 교황청과 종교색이 강한 국가들의 비난에 직면했다.

▲ 1951 미스월드 키키 호칸손

결국 대회 전에도 노출 문제로 참가자들 섭외에 큰 고충을 겪었던 주최 측은 미스월드를 매년 열기로 결정하면서 2회 대회에는 비키니 수영복을 금지하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호칸손은 지금까지도 '비키니를 입고 시상식에 오른 유일한 미스월드'로 남아있다.

▲ 첫 번째 미스월드

단순히 여성의 몸매와 외모만을 심사하는 것이 '좋은 암소를 고르는 것과 뭐가 다르냐'라는 비판에 미스월드 측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꿈과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대해 소개하는 모습을 포함시키며 기존의 대회와 결을 달리했다.

이후 미스월드는 최고의 국제미인대회로 성장했고 현재는 창립자의 부인 줄리아 몰리가 이어받아 2021년 70번째 대회를 맞는다.(2020년은 코로나로 취소)


▲ 본선 참가자들

위 사진 좌측 첫 번째 레오파드 비키니를 입은 여성은 19세의 미스 프랑스 자클린 르모인(Jacqueline Lemoine, 1931~2017)으로 4위를 차지했다. 대회 후 영화배우의 길로 뛰어든 그녀는 음악가 레이 벤츄라(Ray Ventura, 1908~1979)와 1953년 결혼했다. 남편의 성을 따른 자클린 벤츄라(Jacqueline Ventura)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게 남아있다.

▲ 레이 벤츄라와 자클린 르모인 1953.05.10.

미스월드 호칸손은 부상으로 1,000파운드의 수표와 진주 목걸이를 받았다. 이는 현재가치로 약 32,000파운드(한화 약 5,000만 원)에 해당한다. 또 제2회 미스월드 대회가 1952년 11월 14일에 열리면서 그녀의 여왕자리는 475일간 이어지며 현재까지도 최장수 미스월드 재임기록으로 남아있다.

▲ 수표를 들어보이는 키키 호칸손

1951 미스월드 1, 2, 3위는 대회를 홍보하기 위해 영국 전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순회했다.

키키 호칸손은 크리스찬 디올, 자크파뜨, 에르메스 모델로도 활동했고, 덴마크 방송에서는 뷰티 팁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많은 인기를 누렸다.

▲ 좌측부터 2위 로라 데이비스(Laura Ellison Davis), 키키 호칸손, 3위 도린 다운(Doreen Dawn). 우승자 외에는 모두 유부녀였다.

그런데 임기중이었던 1952년 6월, 키키 호칸손은 돌연 노르웨이 국적의 토목업자 올레 요한 하르트네(Ole Johan Hartner, 1917~2005)와 결혼 후 노르웨이로 이주하며 유명인으로써의 활동을 접는다. 당시는 다음 대회 승자에게 무대에서 승계를 하는 의식 같은 것은 하지 않았기에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남편과는 얼마 후 이혼하고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던 중, 관광차 방문한 릴리함메르에서 오슬로 대학에 다니던 두 살 연하의 미국 남성 댈러스 J. 앤더슨(Dallas J. Anderson)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62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얼마 후 미국으로 건너가 앤더슨의 고향인 위스콘신 주 니나(Neenah)에 정착했다.

▲ 모델로 활동했던 키키 호칸손

세월이 흐르며 미스월드가 국제적인 대회로 성장하면서 비록 참가자가 부족한 초창기 대회였다 할지라도 '첫 번째 미스월드'라는 상징성은 점점 강렬해졌다. 호칸손은 1975년 미스월드에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청되며 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 1975년 미스월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키키 호칸손

그리고 1987년에는 스웨덴의 Här är ditt liv라는 프로그램에 재혼한 남편 앤더슨을 비롯해 자매, 지인들과 함께 출연한 모습이 남아있다.

▲ 1987년 스웨덴의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부부는 47년간 함께 살면서 세명의 자녀를 두었고, 2009년 남편 댈러스가 사망하며 키키 호칸손 홀로 미국에 거주하는 상태이다.

▲ 2013년 아들과의 사진 / 남편 앤더슨의 묘비. 공교롭게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현재 생존해있다면 90세가 넘은 나이여서인지 몇몇 사이트에는 2011년 별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2013년 아들과 찍은 사진이 있기 때문에 불확실한 정보다. 또 남편 앤더슨의 묘비나 기념관에도 별다른 안내가 없기 때문에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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