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문 속 덕혜옹주의 사진과 이야기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딸로 태어났으며 친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 양춘기(梁春基)이다.

1931년에는 대마도 번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하였으나 정신질환으로 불화를 겪으며 이혼하였고, 그와의 사이에 낳은 딸도 자살하는 등 순탄치 못한 세월을 보냈다.

1962년 귀국 후에는 이방자 여사와 이왕가 관계자들의 보살핌으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4월 21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기씨(阿只氏)'로 불리던 시절

▲ 1916년 덕수궁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가운데)

1916년, 덕혜옹주가 다섯 살 무렵이 되었을 때 고종은 덕수궁내에 유치원을 만들어 옹주 또래의 귀족 자녀들을 입소시켰다. 사실상 그녀만을 위한 유치원이었다.

▲ 아기씨에게 상전(賞典)으로 사진을. 每日申報 1918.01.25

고종을 비롯한 왕족들은 덕혜옹주를 몹시 귀여워했는데 이것은 위의 기사 내용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 아기씨의 유희에 만족하신 두 분 전하

왕세자 전하(영친왕 이은)께서는 23일 오후 2시 석조전(石造殿)의 연회가 파한 후에 이태왕 전하(고종), 이왕 전하(순종)를 모시고 함녕전(咸寧殿)에 드셔서 세분 전하께서 함께 조선식의 오찬어상을 받으셨다.

오후 3시 이왕 전하를 모시고 준명당(浚眀堂) 뒤에 있는 가정당(嘉靖堂)에 나오시어 복녕당 아기씨 및 학우 다섯 명의 어린 규슈들이 경구 여사와 이조수의 부육으로 유치원의 교양(수업)을 받는 광경을 구경하옵셨는데 이때 복녕당 아기씨는 먼저 일본 창가로 '달아 달아 밝은 달아'같은 아이의 창가를 부르시니 양전하께서는 매우 칭찬을 하옵셨고, 그다음에 아기씨와 학우들이 연합하여 창가를 부르고 또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유희를 하며 손목을 붙들고 춤추는 체조 등을 구경하시는데 그 유희하는 모양이 너무 재미가 있고 또한 귀여워 보여서 원래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옵시는 왕세자 전하께서는 거의 웃음을 그치신 일이 없이 흥미가 깊으시어 비상히 칭찬을 하셨다.

유희가 마친후에 전하께서는 "아기씨가 유희와 창가를 하도 잘하니 상급으로 사진을 찍어주마" 하시고 이번 일본에서 가지고 오신 사진 기계를 잡으시고 친히 아기씨의 사진을 박으시고 다음에는 경구, 이의 두 선생과 아기씨를 위시하여 다섯 명의 원아를 가정당 앞에 모아 세우시고 다시 기념으로 친히 사진을 찍으셨는데 세자 전하께서는 일일이 원아들의 성명을 들으시며 친히 어루만지실 듯이 귀애하심이 배관하는 사람들도 전하께서 온정이 지극히 깊으심에 다시 탄복하였더라.


그리하여 전하께서는 귀여운 아기네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것을 깊이 재미스럽게 생각하시어 경성에 체제 하시는 끝날로 매우 다사하옵신 25일에 창덕궁 오찬회에 가시는 길에 특별히 20분가량의 시간을 비우시어 인사동의 경성유치원을 시찰하시기로 결정하옵셨더라.

- 경구(京口) 여사의 말

복녕당 아기씨를 보육하는 경성유치원의 경구정자(京口貞子·교구치 사다코) 여사는 복녕당 아기씨께서는 천품이 극히 영리하시어 가르쳐드리는 일은 잘 깨달으실 뿐 아니라 기억력이 또한 강하시어 벌써 흘림가나(히라가나)의 오십음을 따로따로 능란히 아시게 되었습니다. 23일에는 양전하께서 나리시어 아기씨와 다른 아기네들의 유희와 창가를 친람 하옵셨는데 아기씨의 옥을 치는듯한 음성으로 부르시는 창가의 활발하옵신 유희에 양전하께서는 매우 만족하옵신 줄로 배찰하였으며 왕세자 전하께서는 친히 사진을 찍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영친왕의 결혼과 고종의 사망

▲ 영친왕의 결혼을 기다리는 아기씨. 每日申報 1918.12.27

- 복녕당 아기씨, 오라버님의 가례를 손꼽아 기다린다.

왕세자 전하(영친왕)와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 여왕 전하의 가례(왕실 가족의 결혼)는 이미 택일까지 되어 불원간에 거행되시겠음으로 이태왕(고종), 이왕(순종) 두 분 전하를 위시하여 각궁가에서 기뻐하심은 두말할 것 없으려니와 세자전하의 동생 되시는 복녕당 아기씨는 며칠 아니되어 여덟 살이 될 터인데 오라버님 전하의 가례를 지내시는 것은 대단히 기뻐하사 손꼽아 기다리시는데 가까이 뫼시는 사람더러 오라버님의 가례가 아직 멀었느냐고 자꾸 물어보신다고.

또 아기씨께서는 연전부터 경성유치원의 경구 여사를 선생 삼아 일본말을 공부하시던 터인데 원래 일본말을 무던히 알아들으시며 쉬운 이야기라도 하실 만큼은 되어서 형님이 되실 방자 여왕께서 조선에 나오시는 날이면 쉬운 이야기는 서로 하실만하다고 합니다.


일곱 살이던 무렵의 기사로 이를 통해 몇 년째 유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친왕의 결혼은 이듬해인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1월 21일 고종이 사망하면서 연기되었고 4월 28일에야 거행되었다.


▲ 어린 덕혜옹주와 순종이 머물던 여막. 매일신보 1919.02.01

고종이 돌연 사망하면서 설을 앞두고 부친을 잃은 복녕당 아기씨(덕혜옹주)를 걱정하는 기사. 오른쪽은 창덕궁내에 설치된 여막(廬幕)으로 순종이 기거하던 곳이다.

 


히노데소학교(日出小學校) 시절

▲ 덕혜옹주가 살았던 창덕궁 집희전(緝熙殿). 매일신보 1921.03.17

1921년 4월 1일부터 집희전 아기씨(덕혜옹주)는 덕수궁 내 유치원을 떠나 히노데소학교(日出小學校) 2학년 입학이 결정되었다. 등하교 시에는 마차로 이동하기로 정해졌으며 항상 두 명의 상궁이 따라다니며 보필했다.

▲ 집희전 아기씨(덕혜옹주)와 학우들. 매일신보 1921.04.01

위 사진은 다섯 살 무렵의 덕혜옹주(왼쪽에서 네 번째)가 경성유치원 학우들과 함께 찍은 것이고 오른쪽의 글씨는 직접 쓴 필체. 덕혜옹주의 왼쪽으로 두 번째가 히노데소학교에 함께 입학하기로 결정된 한상룡의 딸이다.

한상룡(韓相龍·1880~1947)은 이완용의 외종질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고문을 지냈다.

 

친일파 이완용의 마지막과 무덤의 현재 모습

이완용(李完用). 현재 한국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매국노의 대명사이다. 살아생전에는 부귀영화 속에서 큰 권세를 누렸고, 죽어서는 사이토(齋藤實) 제3대 조선 총독 등 5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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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히노데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이름 없이 '집희전 아기씨', '복녕당 아기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소학교 입학 후 '덕혜(德惠)'라는 이름이 정해졌고, 이름 아래에 '옹주(翁主)'라는 존칭을 붙여줄 것을 일본 궁내성으로 상신하였고, 1921년 5월 7일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이왕직 차관이 재차 상신하면서 '덕혜옹주'로 정해졌다.

▲ 수업중인 모습 / 마차를 타는 모습

히노데소학교는 1889년 8월 설립된 한성부의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였으므로 의복은 일본식이어야 했다. 덕혜옹주는 학교에서는 일본 의복을, 궁에 들어와서는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 일본의복을 갖춰입은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입학함에 따라 조선인 자제들도 함께 입학하였는데 민병석(閔丙奭) 자작의 딸 계희(癸姬·9), 공익사 사장 박승직(朴承稷)의 아들 각병(珏秉·8), 이왕직 사무관 육군 중장의 아들 손기륜(孫基倫·9), 한일은행 전무 김한규(金漢奎)의 아들 수환(修桓·8), 창덕궁 경찰서 경시(警視) 황신태(黃信泰)의 아들 계득(癸○·9), 조선방적회사 전무 남정규(南廷圭)의 아들 익희(翼熙·8) 등이었다.

▲ 소학교 2학년 덕혜옹주의 그림. 매일신보 1921.06.14

2학년에 편입한 덕혜옹주는 왕족답게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녀의 책상은 밤색으로 옻칠이 되어있었고, 화장실도 개인용이 따로 준비되었다. 심지어 교장은 덕혜옹주에게 교장실을 휴게실로 내주고 본인은 교무실에 자리를 만들었다.

덕혜옹주가 등교할 무렵이면 교장은 직접 현관까지 마중을 나가 휴게실까지 안내하였고, 옹주 역시 하교할 때는 교무실의 문을 열고 교장과 다른 선생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 근현례(覲見禮)를 마친 왕족들. 朝鮮新聞 1922.05.01

1922년, 영친왕이 이진(관리에게 안겨있는 아기)을 낳고 귀국해 순종과 순정효황후를 처음으로 알현한 모습. 좌측의 소녀가 덕혜옹주이다.

▲ 고화질 버전 / 국립고궁박물관(gogung.go.kr)

좌측부터 덕혜옹주(德惠翁主·1912~1989),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1901~1989), 순정효왕후(純貞孝皇后·1894~1966), 순종(純宗·1874~1926),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1897~1970), 대신이 안고 있는 진(晋·유아기시 사망) 왕자이다. 서양식으로 꾸며진 창덕궁 인정전의 실내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 비원에서 원유회를 즐기는 왕족들. 朝鮮新聞 1922.05.07

비원에 모여 가무와 유희 공연을 즐기는 왕족들의 모습. 상단 사진 맨 왼쪽이 덕혜옹주의 모습이다.

▲ 히노데소학교 4학년 시절 덕혜옹주. 朝鮮新聞 1924.11.16

히노데소학교 4학년 무렵의 모습으로 이 시기 덕혜옹주는 시와 노래가사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 학습원(學習院)에 입학하는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5.03.14

덕혜옹주가 히노데소학교 6학년 진급을 앞두고 4월부터는 동경에 있는 학습원으로의 전학을 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사 속 덕혜옹주의 모습은 해당 시점에 촬영된 것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 히노데소학교의 덕혜옹주 송별회. 京城日報 1925.03.23

1925년 3월 22일 일요일, 동경 학습원(学習院·가쿠슈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를 위해 히노데소학교 6학년 98명과 교원들이 창경원 비원(秘苑)에 모여 노래와 무용공연 등을 하며 송별회를 하는 모습이다.

▲ 창경궁 비원 덕혜옹주 송별회 기념사진 / 경성히노데공립심상소학교사진첩

돌이켜보면 덕혜옹주는 히노데소학교 시절이 가장 즐거웠던 학창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개교 40주년 기념회지에 실린 아래의 시에서 학교명 '히노데(日出)'를 해 뜨는 정원으로 표현하는 재능과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엿보인다.

▲ 히노데소학교 개교 40주년(1929) 기념회지에 실린 덕혜옹주의 시(和歌)

옹주는 가을이면 학급 전원을 비원에 초대해 밤줍기 대회도 하는 등 친분을 나누었고, 일본에 가서는 히노데소학교의 5학년 시절 담임이었던 오가와 기치타로(小川吉太郞) 선생과 서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 덕혜옹주 동급생 초대, 비원에서 습률회(밤줍기). 每日申報 1922.10.24

현재 일출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신 이왕세자 전하(영친왕)의 누이동생 되시는 덕혜옹주께서는 전례에 의하사 금년에도 지난 21일 토요일을 이용하시어 요사이 점점 농후하여가는 창덕궁 비원 내의 추석을 탑하시며 밤줍기를 하시기 위하여 동급 학생 백여 명을 덕혜옹주의 명의 하에 초대하시고 습률대회를 개최하셨다.

백여 명의 동급생들은 너무도 기쁨에 넘쳐 각각 담임교사인 마가라 선생과 오가와 교장의 인솔로 당일 오전 8시 반부터 교문을 출발하여 비원에 도착한 후, 덕혜옹주와 조금도 계급의 차별 없이 함께 율림 사이에서 밤을 주운 다음에는 이왕직원의 접대로 다과의 향응을 받은 후에는 덕혜옹주를 비롯하여 일동은 추석을 띄운 지 초아래에서 몇 가지의 유희를 하는 등 자못 환흥속에서 4시에 폐회하였다더라.

 


일본 학습원(学習院) 시절의 덕혜옹주

▲ 동경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5.03.29

1925년 3월 28일 오전 10시, 조선을 떠나는 덕혜옹주의 모습이 다음날 기사로 보도되었다. 당시 그녀는 시가를 짓는데 재능을 보이며 왕실의 총애를 받았고 귀여운 외모의 공주였던 만큼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는 관심을 받았다.

유학길에 오르던 날, 덕혜옹주는 마차로 경성역에 도착해 여관(女官) 4~5명과 귀빈실에 머물다가 정각에 특별개찰구를 통해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당시 플랫폼에 있던 300명의 관리와 시민들은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추며 조선을 떠나는 덕혜옹주에게 아쉬움을 표시했으며, 이에 그녀는 미소로 답례하며 열차에 올랐다.


▲ 1925년, 일본으로 가기전 히노데소학교 교장, 담임, 교원들과 찍은 사진. 교장과 담임은 덕혜옹주를 배웅하기 위해 수원까지 동행하였다.

덕혜옹주의 동경행에는 한창수와 주영(住永) 여사 및 여관 4~5명이 동행하였고, 정거장에는 자작 윤덕영(尹德榮) 이하 귀족 및 이왕직 사무관 전원이 참석하였다. 또 이왕직 장관 민영기(閔泳綺)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차관은 부산을 거쳐 배편으로 가는 시모노세키까지 함께했다.

열차에 올라탄 후 난간에 나와 플랫폼에 정렬해있는 히노데소학교 동급생 5~60명과 진명여학교 생도 20여 명에게 덕혜옹주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이다. 위 사진 속 덕혜옹주의 뒤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1862~1933) 남작으로 덕혜옹주의 유학과 결혼 결정에 깊이 관여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옹주가 탄 열차가 점점 멀어지자 배웅 나와있던 창덕궁 궁녀들의 울음소리가 경성역에 크게 울려 퍼졌다고 한다.


▲ 동경에 도착한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5.04.03

1925년 3월 30일, 동경역에 도착한 덕혜옹주. 며칠 후에 신문에 보도되었다.

▲ 양장을 입은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5.04.21

'동경에서 촬영된 아름다운 덕혜옹주의 최근 모습(このお美しさ, 東京で德惠姬の近影)'으로 보도된 사진이다.

▲ 순종의 병문안을 위해 경성에 도착한 영친왕 일행. 朝鮮新聞 1926.03.04

1926년 3월 3일, 병석에 있는 순종의 병문안 차 귀국해 경성역에 도착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그리고 덕혜옹주. 3월 8일까지 머물다가 동경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 1926년 3월 7일, 히노데소학교의 관영학예회를 보러 온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6.03.08

1926년 3월 7일 오후 한 시 반, 덕혜옹주는 모교 히노데소학교 동창생들의 초청으로 환영 학예회에 참석했다. 백여 명의 학생들은 담임교사의 인솔 하에 현관에 정렬해 선배 덕혜옹주를 환영하였으며, 한 시간 가량 창가와 유희를 선보였다. 학예회 이후에는 다화회(茶話會)로 담소하다가 오후 4시 창덕궁으로 환궁했다.

▲ 학예회 후 과학교실 앞에서 후배들과의 기념사진

영친왕 부부와 함께 귀국한 덕혜옹주는 8일 아침 경성을 떠날 예정이었으나 돌연 순종이 '외국으로 가는 것이니 며칠 더 쉬다 가라'고 분부하여 조선에 며칠 더 머무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출발 연기로 시간이 생긴 영친왕 이은은 의친왕 이강의 초대로 조선호텔에서 점심을 함께 하며 형제간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 1926년 3월 11일, 경성역을 떠나는 영친왕 일행. 京城日報 1926.03.12

1926년 3월 11일, 경성역을 떠나는 영친왕 일행을 수백 명의 관리와 경성 시민들이 봉송(奉送)하고 있다. 상단의 작은 사진이 영친왕 부부와 덕혜옹주(좌).

1926년 3월 3일, 영친왕 부부와 덕혜옹주가 순종의 병문안을 위해 귀국해 일주일간 조선에 체제하였다. 순종의 분부로 사흘을 더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3월 11일, 영친왕은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나 순종에게 고별문안을 한 후 오전 9시 30분경 창덕궁을 나와 오전 10시 2분 특급열차 편으로 경성을 떠났다.

이날 경성역에는 관민 수백 명이 봉송을 나와 대합실이 매우 혼잡했으며 의친왕 이강은 영등포까지 일행을 전송하였다. 또 민영기(閔泳綺) 이왕직 장관과 찬시(贊侍)및 두 명의 사무관은 부산까지 따라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한국어가 서툰 영친왕 일행을 위해 통역관과 구니토모 나오노리(國友尙謙) 사무관을 동행시켰다. 훗날 영친왕은 사실 한국어가 매우 유창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경성역의 덕혜옹주와 영친왕. 京城日報 1926.04.09

순종의 병세가 위독하자 얼마 후 다시 귀국한 영친왕 일행은 병문안을 위해 지체 없이 여장 그대로 창덕궁 대조전(昌徳宮 大造殿)으로 향했다고 한다.

▲ 소례복을 입은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6.04.11

'순종은 여전히 병상에 있지만 기적적으로 위독한 상태는 벗어났다'는 이왕직의 발표를 전하면서 덕혜옹주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최근의 덕혜공주(最近の德惠姬)'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일본어판 신문에는 '옹주(翁主)'보다는 '공주(姬)'라는 호칭이 많이 쓰였다.

▲ 상복을 입은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6.05.11

순종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26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에 참석했던 덕혜옹주가 검은 상복을 입고 동경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과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6.12.02

순종의 사망으로 이왕 지위가 영친왕 이은에게 넘어감에 따라 새롭게 신분을 확보하고 유지한 왕공족(王公族)의 명단과 7편 215개 조로 이루어진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이 관보로 공포되었다. 해당 기사와 함께 이건과 덕혜옹주가 사진으로 실렸다.

▲ 영친왕 부부의 외유일정. 朝鮮新聞 1927.02.19

영친왕 부부의 5월 유럽 외유 일정이 보도되었다. 순종이 사망하기 전 계획된 일정으로 귀국은 다음 해 5월이었다. 당초 덕혜옹주도 함께 가는 것으로 예상되어 사진이 함께 실렸으나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

▲ 순종의 제사를 위해 귀국한 영친왕 이은 일행. 京城日報 1927.04.12

1927년 4월 10일 오후 7시경, 순종의 제사를 위해 영친왕 이은이 귀국했다. 여왕인 이방자(梨本宮方子) 여사와 덕혜옹주도 대동했다. 영친왕은 이왕직 자동차로 즉시 창덕궁으로 가 효녕전(孝寧殿)의 순종 혼전(魂殿)에 배례하였다.

혼전은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 일본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7.04.16

영친왕 이은과 순종의 제사에 참가하는데 동행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던 덕혜옹주. 1927년 4월 15일 오전 10시 열차를 타고 경성을 떠나 동경에 돌아온 것이 기사로 보도되며 사진이 함께 실렸다.

▲ 연말에 귀국한 덕혜옹주. 朝鮮新聞 1927.12.28

연말을 맞아 조선으로 귀국한 덕혜옹주. 그녀의 사진 중에서 비교적 밝은 모습은 어머니 양귀인을 만나기 위해 귀국하는 순간이다.

▲ 이왕 부부를 마중나간 덕혜옹주(가운데). 京城日報 1928.04.13

1927년 5월 4일, 이왕 부부는 유럽여행을 떠나 10개월간 체류했다. 1928년 3월 3일 일정을 마무리하고 모나코에서 귀국길에 올랐고, 4월 9일 고베항에 도착하자 덕혜옹주를 비롯한 왕실 일원들이 마중 나간 모습이다. 제일 좌측은 이우(李鍝·1912~1945)

▲ 1928년 연말의 덕혜옹주. 京城日報 1928.12.29

병중에 있는 모친 양귀인을 보러 모처럼 경성으로 돌아오는 덕혜옹주의 표정이 밝다.
1928년 12월 28일 저녁 7시에 경성역에 도착하였으며, 창덕궁 주영(住永) 여사와 여관들은 수원까지 마중을 나갔다. 경성역부터는 대기 중이던 이왕직 소속의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에 입궐하였다.

▲ 덕혜옹주의 생모 양귀인. 朝鮮新聞 1929.05.31

1929년 5월 30일 오전 7시, 덕혜옹주의 생모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1882~1929)가 사망했다. 소식을 들은 덕혜옹주는 급히 동경을 출발해 2일 경성에 도착할 예정으로 보도되었다.

▲ 상복을 입은 경성역의 덕혜옹주. 매일신보 1929.06.03

1929년 6월 2일 오전 7시 30분, 검은색 양장 상복을 입은 덕혜옹주가 경성역에 도착했다.

▲ 양귀인의 상여행렬. 京城日報 1929.06.06

복녕당 양씨의 장의는 1929년 6월 5일 오전 8시 30분 발인하였으며, 계동(桂洞) 자택에서 출관하여 9시에 교동대로를 지나 종로통(鐘路通)으로 동대문을 지나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 묘소에 도착해 오후 2시 하관하였다. 이날 덕혜옹주는 상복을 입고 계동 자택에서 함께 나와 상여를 봉송하였다.

▲ 상복을 입은 덕혜옹주. 朝鮮新聞 1929.06.06

일본에 가기 전까지 모친과 살았던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에 머물던 덕혜옹주는 6월 7일 오후 3시에 자동차로 고양군 숭인면 월곡리(현재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모친의 묘소에 다시 방문했다가 4시에 궁으로 돌아온 후 밤 10시 20분 경성역에서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 덕혜옹주도 귀성. 每日申報 1929.08.12

이후 1929년 8월 11일, 조선군사령부 소속으로 있던 영친왕이 여름휴가로 경성으로 올 때 덕혜옹주도 함께 동행해 모친의 묘에 두 달 만에 다시 방문하였다.



정략결혼

▲ 결혼식 이야기가 오고가던 시점. 京城日報 1929.11.08

어느덧 학습원 졸업이 임박하자 결혼식 이야기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졸업과 결혼식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경사가 겹치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다.

▲ 1930년 5월 18일, 경성역의 덕혜옹주. 京城日報 1930.05.20

경성역에서 동경으로 출발하는 모습과 함께 20일 도착하였다고 기사화되었다. 사진은 경성역에서 출발하는 1930년 5월 18일의 모습이다. 이즈음 덕혜옹주는 실어증과 불면증을 겪으며 신경쇠약을 앓고 있던 시점이었다.

▲ 덕혜옹주 결혼소식. 朝鮮新聞 1930.10.31

덕혜옹주의 증상이 약간 호전되자 1930년 10월 31일에는 다음 해 졸업과 함께 대마도 번주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할 예정으로 연내에 예물이 교환된다고 보도되었다. 일부 강한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진행이 된 것은 '결혼으로 가정을 꾸리고 심신안정을 하면 마음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 소 다케유키의 모습. 朝鮮新聞 1930.11.02

왕족이었던 덕혜옹주는 백작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면서 신분이 내려간다. 위 기사에도 '강하(降下)'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문에서처럼 소 다케유키는 애꾸눈이라거나 꼽추가 아닌 멀쩡한 외모였지만 결국 이 결혼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불행이 되었다.

▲ 결혼이 임박한 덕혜옹주에 대한 소개와 필체. 京城日報 1930.11.02

결혼이 가까워오자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특집으로 실렸다. '가까운 유치원까지 유모차(마차)로 통학할 정도로 귀하게 자랐으며 총명한 미성의 소유자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글도 잘 썼기에 직접 쓴 글씨도 함께 소개되었다.

▲ 아동기의 덕혜옹주. 京城日報 1930.11.05

결혼이 가까워오자 자라온 과정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첨부된 어린 시절. '덕혜옹주는 일곱 살까지는 궁궐의 깊은 방(深窓)에 숨겨졌다'라고 소개되었다.

▲ 기모노를 입은 덕혜옹주. 京城日報 1930.11.07

결혼을 앞두고 기모노를 입고 사진을 촬영한 덕혜옹주. 훗날 덕혜옹주는 1930년 9월 무렵 이미 조발성 치매진단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 기모노를 입고 동경에 간 덕혜옹주. 朝鮮新聞 1931.04.24

1931년 4월 21일, 결혼 전 이왕 부부를 만나기 위해 동경에 온 모습.

▲ 기모노를 차려입는 덕혜옹주. 朝鮮新聞 1931.04.26

1931년 4월 14일, 왕공족이었던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昭和天皇)의 칙허가 내려지면서 마지막 결혼식만이 남았다.

▲ 덕혜옹주의 결혼식. 朝鮮新聞 1931.05.12

1931년 5월 8일, 웨딩드레스를 입고 촬영을 하는 모습.

덕혜옹주는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결혼 이후 지면에 언급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결혼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정신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여서 외출을 삼가고 치료에 전념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줄인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 결혼식장의 덕혜옹주. 조선일보 1931.05.12

조선일보는 덕혜옹주의 결혼식 소식을 전하면서 신랑인 소 다케유키 백작의 모습은 검게 칠해 보이지 않게 만들어 보도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인들이 가졌던 덕혜옹주의 결혼에 대한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 광영의 주영 여사. 每日申報 1931.05.29

이왕직 촉탁(囑託)으로 있는 주영수자(住永秀子)여사는 28일부로 훈육등(勳六等)이되어 서보장(瑞宝章)의 하사까지 받게 되었는데 同여사는 전후 20여 년간이나 이왕직의 통역어용괘(通譯御用掛)로 있는 인격자로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부인이 된 덕혜옹주의 교육을 맡아보던 공로에 의하여 그같이 금번에 서훈된 것이라고 한다.


덕혜옹주가 귀국하거나 출국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는데 바로 위 기사의 '주영(住永) 여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본명 스미나가 히데코(住永秀子). 이왕직 소속으로 통역과 왕족들의 교육을 도맡아 하던 가정교사의 위치에 있었다.


양친을 잃은 덕혜옹주가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혼인까지 하였으니, 가정교사로서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하사 받게 되었는데 명단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 실제 수상까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 덕혜옹주의 출산소식. 每日申報 1932.08.16

다음 해인 1932년 8월 14일, 덕혜옹주가 딸을 순산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며칠 후 딸의 이름이 '정혜(正惠·소 마사에)'로 정해졌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어머니가 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가 싶었던 덕혜옹주는 병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1946년 동경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결국 소 다케유키(1908~1985)와도 1955년 이혼하였고, 결혼한 딸 정혜는 1956년 유서를 쓰고 가출해 실종되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후 홀로 세상에서 잊혀가던 덕혜옹주는 주변인들의 노력으로 1962년 이제는 대한민국으로 이름이 바뀐 모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병원에 갇혀 있은지 무려 15년 만이었으며 이후의 삶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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