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북한의 운송편과 공업

1970년대는 북한 경제사에 있어 황금기로 불린다. 사회주의 진영의 체제 과시를 위한 소련과 중공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은 개발의 결과였다. 이런 이유로 60~70년대 초의 북한은 중공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1971~1976년을 북한은 경제 6개년 개발계획의 해로 선언했다. 북한의 1975년의 주요 산업 생산량은 철광석 408만 톤, 철강 생산 330만 톤, 비료 300만 톤, 섬유 11만 9천 톤, 플라스틱 14만 8천 톤, 섬유 7억 2천만 미터, 신발 8,800만 켤레, 육류 55만 톤, 수산물 160만 톤, 달걀 생산 30억 개에 이르렀다. 이것은 1970년에 비해 약 1.5배 성장한 것이었다.

1976년에는 곡물생산이 8백만 톤에 도달하였으며 트랙터 3만 대, 시멘트 8백만 톤과 함께 농민의 소득이 가구당 80%나 증가하였다. 또한 낙후된 주거시설의 개발도 이루어져 도시는 414,000가구, 농촌지역은 472,000가구에 새로운 주택이 보급되는 등 외형적으로는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 속도전은 보여주기 위한 일회성 성과를 목표로 한 것으로 특정분야, 특정 기업에 대한 집중을 비롯한 자원배분의 왜곡 등 부작용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북한 경제를 수렁에 빠뜨리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잠재적인 성장동력의 불씨까지 꺼뜨리고 말았다.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은 서서히 한국에 경제가 뒤처진 것으로 평가되지만 애초에 공산주의 계획경제 하에서는 예정된 결과였다.

▲ 평양공항의 모습. 70년대 당시에는 평양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항공편도 있었다.

북한은 일본 사회당과 1971년 11월에 구성된 일·조(日·朝) 우호촉진 의원연맹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어서 1972년 1월에는 민간 무역촉진 합의서가 교환되고, 1972년 9월에는 문화교류합의서가 교환되었으며, 1977년 9월에는 민간어업 잠정합의서가 교환되는 등 각종 민간 협정이 체결되는 등 조총련의 막후 지원에 힘입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제의하기까지에 이른다.

▲ 조선민항의 소련제 항공기
▲ 북한의 김정태 전기기관차 공장에서 자체 생산한 기관차
▲ 평양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평양의 지하철은 1968년~1973년 사이에 지어졌고 개통되었다. 이것은 서울보다 1년 빠른 것이었다. 사회주의 풍이 물씬 풍기는 장식들과 전시에는 방공호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어마어마한 깊이를 자랑한다.

▲ 인쇄소

1970년대에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장비 지원도 많이 받았다. 덕분에 인쇄술 등 일부 산업에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생산해냈다.

▲ 텔레비전 공장
▲ 평양 모란봉 시계공장의 노동자들

모란봉 시계공장은 70년대 후반 스위스와 합작으로 완공된 곳이다. 각종 계기류를 평양 측정기 공장, 평양 도량형기 공장 등의 정밀기계공장에서 자체 조달하였다. 83년에 귀순한 북한 신중철 대위의 증언에 따르면, 모란봉 시계는 가격이 400원으로 북한 중산층의 당시 월급 110원을 감안하면 고급이었으나 잦은 고장으로 품질이 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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