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광주공원에 있었던 지금은 사라진 기념물

1897년 목포개항 후 광주에는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미국과 일본인들을 위한 외국인 거주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개화된 국제도시로 첫 발걸음을 떼던 광주는 1905년 을사조약과 함께 본격적인 식민도시의 길을 걷게 된다.

현재의 광주공원도 1913년에 조성된 곳으로, 무등산과 마주 보는 성거산(聖居山) 정상 1만여 평의 부지에 들어섰다.

당시 성거산은 성스러운 거북이의 모습으로 '성구강(聖龜岡)'이라고도 불렸기에 공원의 이름도 구강공원(龜岡公園)으로 지어졌다.

▲ 광주공원에 현재 남아있는 신사 계단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공원의 정상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신사(神社)가 건립되었고 벚꽃과 여러 가지 기념물들이 들어서며 일본풍 공원으로 완성되었다.

해방 후 신사 건물은 파괴되었고 현재는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만이 남아있다. 당시 신사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현충탑이 자리하고 있다.

▲ 일제시대 광주신사(광주공원)
▲ 광주 공립 중학생의 신사참배(1935년) ⓒ 광주광역시 「사진으로 본 광주 1백년」
▲ 전남여고의 광주신사 참배(1935년)
▲ 광주공원 현충탑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금융조합 기념비

대한제국은 '지방금융조합 규칙'과 '지방금융조합설립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07년 5월 31일, 광주에 최초의 지방금융조합을 설립했다. 이후 1918년 금융조합(金融組合)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28년 조선금융조합협회로 이어진다.

해방 후에는 1956년 농업은행의 설립과 함께 전신이었던 대한금융조합연합회는 해산되었고, 농업은행은 1961년 8월 농업협동조합과 통합해 현재의 농협중앙회가 되었다.

▲ 제막식 당시의 금융조합기념비 【朝鮮新聞 1931.11.21】

일제시대였던 1931년 11월 5일, 조선금융조합 창립기념비가 광주공원에 들어섰다.

그 양식은 마치 조선총독부 청사의 첨탑과 비슷한 모습으로 높이 약 10.6m(35척), 공사비는 약 4천여 원이 소요되었다. 공사비용은 조선 각지의 금융조합에서 각출하였기에 오직 광주만이 소유한 명물로 유명했다.

▲ 조선금융조합 창립기념비(1950) ⓒ 박선홍 저 「광주1백년」

이 기념비는 6.25 이후에도 남아있었으나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되었고, 해당 위치에는 현재 어린이헌장탑이 세워져 있다.

■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 여사의 동상

광주에 외국인 거주지들이 조성될 때 광주천 너머 읍성 서문밖에는 불교의 종파인 정토진종(浄土真宗)의 포교를 목적으로 일본인 승려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그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발을 들였다.

▲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 1845~1907)

광주에 온 오쿠무라 여사는 포교활동에 중점을 둔 오빠와는 달리 광주에서 농업교육을 실시하는데 힘썼고, 전라남도 관찰사 윤웅렬(1840~1911)과 협의하여 1898년 9월 실업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청년 20명을 모집해 일어, 산술, 양잠 등을 가르쳤다.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조선인 농민들을 학교에 계속 나오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일본인이 토지를 매입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대한 항일감정도 일어나서 초창기에는 주민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는 등 큰 고생을 겪었다.

▲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오쿠무라 여사, 그 옆은 장녀 오쿠무라 토시코(奧村敏子)로 1924년 경성에 덕풍(德風)유치원을 개원했다.


하지만 오쿠무라 여사의 별세 후에는 일본인들의 정착을 돕고 광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1926년 4월 24일 구강공원(광주공원)의 신사 경내, 현재의 무진회관이 있는 자리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졌다.

▲ 광주공원의 오쿠무라 이오코 동상

오쿠무라 이오코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기에 보기 드문 행동력을 지닌 사회운동가로 평가받았으며, 현재까지도 고향 사가현 가라쓰시(唐津市)에서는 마츠우라 다리(松浦橋) 건설(1896년)을 추진해서 이루어낸 업적을 추앙받고 있다.

사후에 위인전과 전기영화가 제작되었고 도쿄와 요코하마, 한국 광주, 대만 타이난을 비롯해 1931년 가라쓰 성 옆 교차로에는 오쿠무라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이 나자 전시물자로 공출되기도 하였으나 가라쓰에 있던 동상은 전후에 다시 제작되어 1959년 원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 1959년 4월 8일 가쓰라시에 재건립된 오쿠무라 여사 동상. 공사비 250만 엔

구강공원(광주공원)에 있던 오쿠무라 이오코의 동상도 1944년 전쟁중에 공출되었기에 최소 1930년대에 출생한 광주시민이어야만 실제 목격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 대만 타이난 애국여성회관의 오쿠무라 이오코 동상
▲ 사가현 가라쓰시의 동상 제막식(1931년)

가라쓰, 광주, 타이난에 있던 동상의 사진들을 보면 지팡이를 짚고 있는 오쿠무라 여사의 사진을 모델로 한 공통점이 있으며 현재 가라쓰시에 세워져 있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동상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 오쿠무라 여사 동상의 현재 모습

현재 오쿠무라 여사에 대한 한국 쪽의 평가는 당시에는 여장부로 불리며 순수한 봉사 목적을 띄었던 인사로 여겨졌으나 이후의 연구에 따르면 1901년 전시 유족구제를 목적으로 한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애국 부인'을 발행하는 등 군국주의를 부녀자들에게 확산시키는 일제식민화 정책의 첨병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일본 쪽에서도 오쿠무라 여사가 전시체제 여성운동의 출발점에 있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오쿠무라는 설립자일 뿐 사후에 단체가 극단적으로 변화한 책임을 모두 그녀에게 떠넘기는 것은 가혹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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