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골프에 빠진 이완용의 아들
- 정리
- 2021. 9. 28. 22:02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종묘에 보관된 어보를 분실하고도 무책임하게 골프를 치러 다닌 중독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 것으로 유명한 일화가 지금도 남아있다.(관련 글)
아래 1928년 3월 22일 자 매일신보 기사 속에서 100년 전에도 유유히 고급 스포츠 골프를 즐기는 극소수의 조선인 귀족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취미인 순례기(趣味人巡禮記)
- 평민적 귀공자는 골프장에서 활약, 한번 재미들이면 놓지 못한다.
- 이항구, 문대식 두 사람
스포츠 중 가장 고급 취미 중에도 가장 실익을 주는 놀음은 '골프'이다.
백만장자로 한일은행 두취(頭取, 은행장) 민대식(閔大植, 1882~?) 씨는 지금 골프 클럽에 유수(有數)한 선수로 토요일, 일요일에는 한 번씩 청량리로 자동차를 몬다.
경성 골프클럽에 회원은 130인가량이나 되나 그중에 조선사람으로는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이항구(李恒九, 1881~1945) 씨와 민대식 씨 그 외에 김한규(金漢奎, 1877~1950), 안순환(安淳煥, 1871~1942)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중에도 이항구 씨는 가장 오래된 골프 예찬자로 골프채를 잡은 지 6년 유여(有餘)! 조선 골프계에는 가장 구군(舊軍)에 속하는 것이다.
작년까지도 이항구 씨는 위원장이었으며 모여있는 이가 대개는 관민의 대표적 인물들 뿐이라. 이항구 씨의 사교적 지위는 이것으로써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는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민대식 씨는 작년부터 골프에 맛을 들였으나 그 수법이 매우 묘하여 한 바퀴 두 바퀴 골프 그린을 도는 동안에는 은행 회계도 채권 정리의 고뇌도 모두 잊고 청춘시대에나 돌아간 듯이 오직 유쾌한 시간을 계속할 뿐이라 한다.
골프는 돈이 드는 놀음이다. 청량리 골프장까지는 자동차를 타야 하고, 기구도 또한 돈 100원 들여서는 시원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함으로 골프는 부르주아의 놀음이라고 하나 사유재산을 시인하는 시대에 부르주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며,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부르주아들에게도 그들에게 맞는 취미와 운동이 필요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어쨌든 골프에 재미를 붙이는 게 최후이다. 한번 재미만 붙여놓으면 여행을 가더라도 그 가는 곳에 골프장이 있으면 귀골(貴骨)들도 서슴지 않고 그 무거운 골프 도구를 어깨에 메고 나선다. 이 점으로 보아서 골프에 재미 붙인 귀공자들은 그야말로 귀공자 중의 평민적이라고 볼 수 있다.
휴일만 되면 이항구 씨는 의례히 골프채를 둘러메고 원산(元山)으로 간다. 민대식 씨도 금년 여름에는 어디든지 골프 원정을 갈 기세이다.
■ 조선인 최초의 골퍼, 이항구
기사를 통해 조선에서 골프를 즐기는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며, 단 네 명의 조선인 유력자들만이 골프를 취미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구력 6년이라고 하니 최소 1922년부터 골프장에 발을 들인 것으로 이는 기록에 남아있는 조선인 최초의 골퍼이다.
※ 한편 영친왕 이왕 부부는 1927년 5월에 10개월간 유럽여행을 하였는데, 이때 스코틀랜드의 골프 성지 세인트 앤드루스 등지에서 라운딩을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즉 영친왕은 최초로 해외 골프 라운딩을 한 조선인이다.
기사에 나오는 청량리 골프장은 1924년 말에 폐장한 효창원 골프장을 대신해 청량리 뒷산에 새롭게 신설된 곳이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효창원 골프장은 경치와 지형변화가 많아서 골프 경기에는 적당하였으나 초심자들에게는 어려운 코스였기에 9개의 홀 중 7개 만이 사용될 정도로 비효율적이어서 폐장 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건설비로 5만 원의 예산을 들인 청량리 골프장은 1924년 12월 6일 완공되었고, 교통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자동차 회사와 특약을 하여 동대문~청량리까지 구간을 1원의 교통비를 받고 왕복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청량리 골프장 내에는 식당과 기타 부속건물이 들어섰으며 골프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도 모두 완공되었으나 잔디가 고르게 나기를 기다려 다음 해 봄에 정식 개장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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