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만수대의 '조선왕조 마지막 왕' 순종 행차기념비

북한 평양 대동강 부근에 있는 만수대(萬壽臺)는 해발 60m의 언덕으로 평지가 대부분인 평양에서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동상을 비롯해 북한의 정치적 상징성을 나타내는 기념물들이 많은 성지로 유명하다.


▲ 만수대 위치

이곳이 성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평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형 탓도 있지만 대한제국 시절, 순종의 순행(巡幸)이 계기가 되었다.

1909년 1월 27일,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시기에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제안으로 순종은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조선과 대한제국을 통틀어 왕실에서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몇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어서 당시 평안남북도 일대는 난리가 났다고 한다.

▲ 1909년 1월 27일, 평양역에 도착한 순종 일행

평안남도 관찰사였던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순종을 맞이할 봉영(奉迎)위원 15명과 지역유지들을 대기시켰으며, 각 학교의 학생들은 눈코 뜰 새가 없이 황제 환영 연습을 시작했다.

▲ 1909년 1월 27일, 평양역 앞에 대기중인 일행

당시 대성학교(大成學校), 일신학교(日新學校), 청산학교(靑山學校),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대동학교(大同學校), 기명학교(箕明學校), 숭덕학교(崇德學校), 숭실학교(崇實學校), 광성학교(光成學校), 숭현학교(崇賢學校), 정진학교(正進學校)등의 사립학교를 비롯해 부근의 관·공립학교들이 모조리 동원된 행사였다.

▲ 1909년 1월 27일, 평양역을 떠나 행재소로 향하는 행렬과 환영인파

지역의 사립학교들은 모두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래, 지역유지들이 '우리도 이제 살려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일념 하에 설립한 곳들이어서 그런지 재학생들의 기풍 역시 열의에 불타올랐다.

▲ 순종이 머문 평양 행재소

1월 27일, 순종황제가 평안남도 대동군에 위치한 관찰도(觀察道) 내아(內衙)에 도착하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숙소 인근까지 들어가 만세를 외치고, 순종과 동행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1859~1943)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1864~1926)의 숙소에도 찾아가 태극기를 흔들며 밤새도록 만세를 불렀다.

▲ 1909년 1월 27일, 평양 행재소 앞 경관들과 인파

하지만 개혁과 개방을 등한시하고 왕실을 보전하기에만 급급하다 세계 흐름에 뒤처져 한일병합으로 흘러가는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면 어린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는 서글픈 장면이었고 결국 다음 해에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1909년 2월 1일, 평양 만수대에 오르는 순종
▲ 1909년 2월 1일, 만수대 정상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 순종 일행을 촬영하는데 사용된 카메라
▲ 1909년 2월 1일, 만수대에서 바라본 모란대 전경
▲ 1909년 2월 1일, 만수대에서 내려오는 순종. 부축을 받는 병약한 모습이다.

백성들이 자신을 뜨겁게 환영하는 모습에 순종은 매우 흡족해했고, 방문이 끝난 후 봉영위원들에게 2천 원씩의 하사금을 내렸다.

평양의 봉영위원들은 그 돈으로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만수대 언덕에 들어선 '융희제행행기념비(隆熙帝幸行紀念碑)'였다.


▲ 융희제 행행 기념비 【조선일보 1929.01.02】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만수대에는 소나무 몇 그루와 순종의 행행기념비만이 세워져 있었다.

이후 1935년 11월 평양부에서 3,800여 평의 만수대 부지를 교부받아 개발계획을 세웠는데, 이 기념비의 존재 때문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 아닌 주택이나 건물을 짓는 것은 반대하는 주민들도 많았다고 한다.

▲ 1920년대, 평양에 소재한 평안남도 도청

하지만 만수대 언덕에 평안남도 도청, 측후소(測候所)와 소방서 등 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1938년경에는 평양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던 행행기념비는 초라하게 가려지고 있었다.

▲ 평양 만수대 현재 모습

이후 이 기념비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해방 이후 발발한 6.25 전쟁으로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때 살아남았더라도 공산주의 정권인 북한에 의해 철거되었을 것이다.

나라의 국운이 끝을 보이는 상황에서도 황제의 행차를 칭송하고자 세워진 기념비는 이제 볼 수 없다. 하지만 왕조시대보다 더 기이한 북한정권의 우상들이 들어서면서, 만수대는 여전히 군주의 성역이자 퇴보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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