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가 납관에 묻힌 이유

'퀴리 부인'이라는 호칭으로도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자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폴란드 바르샤바 태생으로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Maria Salomea Skłodowska)이다.

마리 퀴리의 업적은 화려하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노벨상(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을 받았으며, 이는 다른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이다. 또 그녀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 1897~1956)도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면서 '최초이자 유일한 모녀 노벨상 수상자'로 남아있다.

▲ 퀴리 부부와 딸 이렌

즉 '퀴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상식이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현대 과학사에 매우 중요한 위인인 것이다.

마리 퀴리는 사후 프랑스 파리 카르티에 라탱(Quartier latin)에 위치한 국립묘지 팡테옹(Panthéon)에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함께 잠들어있다. 팡테옹 묘지는 가장 위대하고 명예로운 프랑스인들이 묻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곳에 묻힌 인물이기도 하다.

▲ 퀴리 부부의 관

하지만 그녀의 시신은 1인치 두께의 납으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도록 설계된 관 속에서 특별하게 취급되고 있다.

■ 삶을 송두리째 건 연구

1896년, 마리 퀴리의 지도교수였던 앙투안 앙리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이 방사선(베크렐선)을 발견한 후 그녀도 이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는 방사능의 위험성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 마리 퀴리는 방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실험에 몰두했다. 심지어 실험실에서 쓰던 시험관을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가져와 연구할 정도였다.

결국 마리 퀴리의 집전체와 그녀의 장신구, 책, 노트, 옷 등은 모두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에 피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 퀴리의 실험실 논란

1980년대에는 파리에서 5.3km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건물이 방사능 오염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큰 소동이 있었는데, 바로 이 건물의 3층이 마리 퀴리가 사망할 때까지 실험실로 사용한 곳이었다.

▲ 마리 퀴리의 실험실 건물

그녀의 사후에도 파리과학대학 핵물리연구소와 퀴리 재단의 방사선 원소 연구를 위해 사용되던 이곳은 1978년 폐쇄되었으나 1980년대부터 인근의 주민들에게 높은 암 발병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 실험실을 탓했고 프랑스 정부는 1991년 제염작업과 일부 건물의 철거를 하였으며 일상보다 낮은 수준의 방사능 수치를 확인할 때까지 정기적인 방사능 검사도 실시해야 했다.

 

▲ 마리 퀴리의 실험실 노트

그녀가 쓰던 실험실 노트들은 프랑스의 국보이자 과학계의 보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험물질'이 되어버렸고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의 납으로 된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만약 마리 퀴리의 소장품에 대해 연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허가를 받고 방호복을 착용해야 하며 '모든 위험은 자신이 진다'책임면제 서류에 서명을 해야 열람이 가능하다.

▲ 마리 퀴리의 노트를 열람하는 모습

마리 퀴리의 사망원인 역시 방사능 피폭 때문으로 인류는 그녀가 삶과 바꾸어 내놓은 연구결과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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