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소련 '붉은 광장 국제공항' 강제 개항 사건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의 랜드마크이자 러시아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냉전시대의 한 축이었던 강대국 소련의 체제 선전의 공간이었던 곳인지라 과거나 지금이나 경계가 엄청나게 삼엄한 곳.

하지만 1987년 5월 28일, 서독 함부르크 출신의 마티아스 러스트(Mathias Rust)라는 18세 소년이 단발엔진 경비행기 '세스나 172 스카이호크(Cessna 172 Skyhawk)'를 몰고 크렘린궁 인근에 착륙하며 철의 장막의 방공망을 뚫어버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 붉은 광장(Red Square / 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당시 마티아스 러스트(1968년생)는 어린 나이답게 불과 50시간의 비행경험을 지닌 아마추어 조종사였다.

그는 임대한 세스나 경비행기로 5월 13일 함부르크를 떠나 스코틀랜드 셰틀랜드 아일랜드와 대서양 페로 제도 등을 여행하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일주일을 보낸 다음,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거쳐 5월 25일 핀란드 헬싱키에 착륙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5월 28일 오후 12시 21분, 핀란드 헬싱키-말미 공항에서 스톡홀름으로 간다고 보고하며 '역사적인' 이륙을 감행했다.


▲ 마티아스 러스트의 비행노선

스톡홀름으로 간다는 비행기가 보고와 달리 진행하자 항공교통관제사들이 마티아스와 교신을 시도했지만 그는 모든 통신장비를 꺼버렸다. 당시 관제요원들은 비행기가 추락했다고 판단하고 핀란드 군대를 동원해 수색작업까지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소련 쪽에서도 난리가 났다. 오후 2시 29분, 소련 방공군이 날아오는 세스나 비행기를 레이더에서 포착했고 지대공유도탄 대대가 조준까지 완료했으나 발사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두대의 미그-23 전투기도 출격했으나 교전허가 역시 상부로부터 허가되지 않았고 결국 주시하던 소련 측이 저공비행하는 경비행기를 놓치면서 마티아스는 유유히 750km를 날아 오후 6시 43분 붉은 광장에 착륙하기에 이른다.

▲ 붉은 광장에 착륙한 세스나

마티아스는 당초 크렘린궁 내부에 착륙할 예정이었으나 보이지 않는 성벽 안에 착륙하면 KGB로부터 체포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되고 소련이 사건 자체를 부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붉은 광장으로 착륙지점을 변경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차례 선회비행을 한 다음 볼쇼이 모스크보레츠키(Bol'shoy Moskvoretskiy) 다리에 착륙했다.

소련인들은 비행기에서 내린 마티아스에게 열광했다.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고 질문하자 그는 우선 "독일"이라고 대답했는데 당연히 동독이라고 생각한 소련인들은 그가 "서독"이라고 정확히 말하자 충격을 받았다. 붉은 광장에 머물던 마티아스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 처분을 기다리는 마티아스

1987년 9월 2일, 마티아스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는 폭력행위, 항공법 위반, 국경 침범으로 노동수용소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다.

▲ 1987년 9월 4일, 모스크바 법원에서 마티아스 러스트가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두 번이나 격추당할뻔한 위기를 넘긴 마티아스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그해 11월,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역사적인 '중거리 핵전력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에 서명하며 평화무드가 조성되었고, 소련은 서방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자 그를 14개월 만에 석방하였다.

▲ 1988년 8월 3일,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통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는 마티아스 러스트.

이후 마티아스는 이 비행의 목적을 '서방세계와 공산권 사이에 평화의 가교를 놓기 위한 소명의식을 가진 비행'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이 사건은 그가 삶에서 벌인 즉흥적인 행동 중 하나였고 단지 억세게 운이 좋았을 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마티아스는 석방 이후 1989년 병원에서 복무(서독은 2010년까지 징병제)하다가 자신이 호의를 보인 여간호사가 그를 거부하자 칼로 찌르고 징역을 가는가 하면 2001년에는 차량 절도, 2005년에는 사기죄로 유죄를 받는 등 충동적인 인물상이었다.

▲ 1989년, 귀국 후 사건당시 복장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마티아스 러스트.

마티아스가 역사에 남는 비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승객과 승무원 269명의 목숨을 앗아가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이미지가 실추된 소련의 방공부대가 빠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갈팡질팡했고, 사건 전날 토르조크(Torzhok)에서 항공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구조헬기가 오가면서 마티아스의 세스나 경비행기와 혼동되어 추적을 놓치는 등 여러 행운들이 겹친 것이었다.

▲ 1992년, 소련 붕괴 후 붉은 광장을 방문한 마티아스 러스트.

하지만 마티아스의 의도가 충동적이었다 해도 역사는 그의 발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에 반대하던 국방장관과 소련방공군 총사령관을 비롯해 2,000여 명에 달하는 수많은 고위 장교를 해임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탄력을 받았고, 조그만 세스나의 날갯짓은 독일 통일과 거대한 소련이 붕괴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 1987년 6월 3일, 한 독일 소녀가 '붉은 광장(Roter Platz) 국제공항 개항(Eröffnung)'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 붉은 광장은 소련인들에게 '셰레메티예보 제3 터미널'로 불렸다. 당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Sheremetyevo International Airport)에는 제1터미널과 제2터미널이 있었는데, 마티아스 덕분에 새로운 노선이 개항되었다는 뼈아픈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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