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집터가 정독도서관이 된 사연

구한말 급진 개화파였던 김옥균(金玉均, 1851~1894).

'삼일천하'로 일컫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하면서 굵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현재 김옥균이 살던 경성(서울)의 가옥은 집터로만 남아있는데, 바로 종로에 위치한 정독도서관이다. 서울교육박물관 뒤편 도서관 부지 내 잔디밭에 있는 기념 표지석에는 '김옥균 집터(종로구 화동 260번지)'라는 안내가 적혀있다.

▲ 김옥균 집터 표지석. 1992년 설치

구한말 화동 일대에는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고위 관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즉 거주지로서는 최고의 입지를 갖춘 주택가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변으로 인해 개화파들이 망명을 떠나고 멸문에 가까운 참화를 당하자 이곳도 폐허가 되었는데, 아래 1926년 동아일보에서는 부동산 중개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김옥균의 집과 관련된 사연이 잠깐 나온다.

- 김옥균 씨 생가
- 흉가라고 터만 남아
- 15년간 집을 매매한 정기인(鄭基寅)씨

지금은 세상인심이 모질어져 그런 것을 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런 집은 싸다고 일부러 골라서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내가 처음 복덕방에 나와 놀기 시작할 때까지도 흉가(凶家), 복가(福家)까지 골랐답니다.

어린애가 장난하다가 우물에 빠져 죽은 집 같은 것도 흉가라고 몇 해를 두고 팔려해도 사는 사람이 나서지 않은 일까지 있었답니다. 우선 지금까지도 오히려 터전만 남아있는 안국동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 앞 나무장 된 터전에 있던 집도 흉가로 유명했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헐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당시 우국지사로 일본에서 자객에게 돌아가신 김옥균 선생이라든지 미국에 망명해있는 서재필 박사가 모두 그 터에 있던 집에서 났다고 하여 큰 흉가로 불리었었으며... (하략)

【동아일보 1926.01.02】


최고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던 주택가, 게다가 장원급제를 한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이 살던 곳이라 집을 매매한다면 웃돈이 붙어 거래되었을 곳이 정변으로 한순간에 역적의 터가 되어 흉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암살 후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으로 송환되어 참수되고 능지처참된 후 전국에 전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 김옥균

촉망받던 고위 관료가 한순간에 토막 나서 팔도를 떠도는 것은 백 년 전이라 해도 백성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고 악운을 불러들인 집은 그 누구도 사려하지 않았다.

흉가로 방치된 개화파들의 집은 쓰러져가다 결국 헐리게 되었고, 1900년 한성중학교(경기중·고등학교 전신)가 설립되면서 그 부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학교가 이전한 후인 1977년 1월, 현재의 정독도서관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 서울에서 가장 큰 정독도서관 【사진: Wikimedia】

만약 개화파들이 천하를 이루었다거나 혹은 갑신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지금의 정독도서관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현재까지도 풍수지리나 사주팔자가 여전히 신봉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권력가를 탄생시킨 이곳의 풍경은 오랜 명문가의 가옥이 즐비한 거주지로 남았거나 혹은 평범하게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화파의 재산이 왕가에 몰수되고 아무도 살지 않으려 하는 흉가로 전락한 덕분에 고급 주택가였던 곳이 학교에 이어 공공기관 부지로 변모하며 완전히 운명이 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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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2021.11.02 17:02 신고

    지난주에 다녀와서 더 반갑네요.ㅎ

    • 2021.11.05 11:40 신고

      개화파들이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도서관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