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임종 순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조선왕조 오백 년의 마지막 군주였던 순종(純宗, 1874~1926). 평소 위장병, 신장염, 심장병, 류머티즘 등의 지병을 갖고 있던 그는 임종 4개월 전부터 와병 중이었다.

1926년 4월 25일, 자정을 넘기면서 순종의 맥박과 호흡이 빈약해지자 왕족과 친족 및 귀족들은 급히 연락을 받고 창덕궁에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은 당번 의료진이었던 이와부치 도모지(岩淵友次)와 안상호(安商浩) 박사 등의 노력으로 새벽 네 시경에 안정을 되찾았다. 이와부치 도모지 박사는 두 달 전 이완용 백작의 임종도 지켰던 인물이었다.

대기 중이던 영친왕 부부를 비롯해 의친왕, 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안도하며 모두 침소와 집으로 돌아갔고, 담당자인 윤덕영(尹德榮, 1873~1940) 자작과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한창수(韓昌洙, 1862~1933)도 병실이 차려진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에서 다시 잠을 이루었다.


▲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모인 차량들

잠시 불안했던 시간이 평온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던 창덕궁은 갑작스러운 비보에 휩싸이게 된다.

- 최후 일각까지 부왕을 추모
- 최후 임종은 이지용, 민영찬 두 사람
- 머리를 금곡을 향하시고 부왕을 추모하시며 승하

25일 새벽, 네시에서 다섯 시까지 창황히 모인 여러분은 다시 일시적 안정을 얻으신 전하의 병실을 떠나 각각 흩어지니 쓸쓸한 월석(月夕)에 빗긴 전하의 병실에는 김충연(78)과 천일청(78) 노상궁과 젊은 상궁 외 수명과 적십자사 병원 간호부 두 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고요히 누워계신 전하께서는 별로 괴로운 빛도 보이지 않으시고 혼곤히 누워계실 때에 마침 찬시 엄윤섭 씨가 들어와 전하께 "민영찬과 이지용이 대령하였습니다" 복주를 하니 전하께서는 눈을 뜨시며,

"이리 가까이 오라고 해라" 하시어 병석에 가까이 시립(侍立)하는 두 사람을 모시며,

"너희들을 또 수고를 시켰구나. 이제는 아까보다 훨씬 나은 모양이다. 그리고 전에는 남으로 머리를 두고 서로 향하여 누워 매우 불편한 것 같더니 아까부터는 다시 동으로 향하여(금곡 어릉을 향하여) 돌아누웠더니 어찌나 편한지 모르겠다."

이 같은 말씀을 몇 마디 평시와 같이 하시더니, 나중에는 "내가 무엇이 먹고 싶다" 하압시매 분부를 받들어 즉시 엄찬시는 숙직 중인 암연 박사(이와부치 도모지)에게 상의하러 나가고 여전히 병실에는 근시 여자들 외에는 백작 이지용 씨와 순명황후의 친족이 되는 민영찬 씨가 있었으며 민장관(민영기)이 드나들 뿐!

이리하여 이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이왕 전하의 승하하실 시간은 가장 고요히 가장 안온히 창덕궁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평소 효자로 알려진 순종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머리를 고종이 있는 홍릉(洪陵) 방향으로 두니 편하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위독한 순간을 맞았던 사람이 '무언가 먹고 싶다'고 하는 상황은 어딘지 이상하다. 순종은 건강할 때도 음식을 탐하지 않는 타입이었고 망가진 치아로 인해 음식 섭취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 그가 음식을 찾는 것은 임종의 전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순종의 상태는 급박해졌다.

- 승하를 의미하는 이와부치 박사의 암루(暗淚)
- 전내(殿內)에 낭자한 곡성

엄찬시의 말을 들은 암연 박사가 다시 전하께 의향을 여쭈어보려고 병실에 들어서기는 대정 15년(1926년) 4월 25일 상오 6시! 전하께서 승하하실 바로 오 분 전이었었다.

암연 씨가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우선 전하의 옥안을 뵙더니 그만 그의 흰 낯빛은 파랗게 질리며 평시의 침착하던 태도는 창망하여져 가지고 우선 이지용, 민영찬 두 사람을 보며 "잠깐 나가 계십시오"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즉각적으로 전하의 최기가 박도함을 느끼고 즉시 문을 나서서 마침 지나가던 민장관을 만나서 이 말을 하니 민장관 역시 낯이 변하며,

"그러면 다시 들어가 뵈옵자" 하여 세명이 병실에 들어가서 전하의 옥안을 뵈오니 전하께서는 자는 듯이 눈을 감으시고 옆에 뫼신 암연 박사의 눈에는 암루가 방울방울 흘러내렸으니 때는 25일 상오 6시 5분.

드디어 창덕궁 전하는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마침내 전하의 병실에서 상궁들의 흐느껴 우는 소리가 흘러나가자 별실에서 자던 윤덕영, 한창수 등도 뛰어오며 이왕비, 이강 공, 왕세자 전하도 창황히 병상 앞에 이르시기에 이른 것이다.


꺼져가는 왕조의 모습을 연상시키듯이 사람들이 모두 귀가하고 불과 두 시간 남짓 후에 순종은 너무도 고요하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임종 순간 곁에 있었던 사람은 의료진, 지밀상궁인 김충연과 천일청 여사, 젊은 내인 손(孫)상궁과 장(長)상궁, 민영기 이왕직 장관과 민영찬, 이지용 등 열명 내외였다.

▲ 즉위할 당시의 순종

이들 중 이지용(李址鎔, 1870~1928)백작은 종척귀족 중에 유일하게 임종을 지켰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그의 집에만 유일하게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순종이 위독하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즉시 창덕궁으로 입궐했는데 이지용의 집에만 하인이 직접 도보로 연락을 취했다. 결국 방문한 사람들이 모두 되돌아간 6시경이 되어서야 이지용은 창덕궁에 도착을 했고 공교롭게도 순종의 임종을 지키게 된 것이었다.

비록 쓸쓸한 임종을 맞았지만 경성 시내의 많은 상점들은 순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부터 일시적으로 폐점에 들어가는 등 슬픔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 상점들이 문을 닫은 종로거리

순종의 서거는 당일에 즉시 일본 궁내성(宮内省)으로 전달되었으나 답전은 빨리 오지 않고 있었다. 궁내성의 발표가 없으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발표가 미뤄지다가 다음날인 26일 오후 9시 35분에야 궁내성은 '26일 오전 6시 10분 창덕궁 전하 승하(昌德宮殿下昇遐)'를 공식 발표하였다. 몇몇 자료에서 순종의 사망일이 4월 25일 혹은 4월 26일로 다르게 기록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벚꽃철을 맞아 4월 24일부터 야간개장을 했던 창경원도 폐쇄되었다.

조선의 각 언론사는 급히 서거 소식을 전했다.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는 사망 당일인 4월 25일에 호외를 발행했으며, 조선일보는 궁내성의 공식 발표를 기다렸다가 하루 뒤인 26일에 호외를 발행했다.

▲ 순종의 서거를 전하는 호외. 매일신보(좌)와 동아일보(중)는 25일 호외를 발행했음을 알리고 있으며, 조선일보(우)는 26일 발행된 호외이다.

순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각 학교는 임시휴교를 하고 대표적 극장인 단성사와 우미관은 공연을 중단하는 등 전국이 장례 분위기에 돌입했다.

유흥업계의 기생들조차 26일부터 휴업을 단행하였고 27일 오전 11시에는 한성권번, 대정권번, 한남권번, 조선권번등 각 권번에서 나온 약 500명의 기생들이 소복을 입고 검은 댕기에 흑각잠(黑角簪)을 꽂고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곡을 하였다.


▲ 궁궐앞에서 곡하는 여인들

또 유명 요리점인 명월관 본점과 유일관, 국일 관등은 26일부터 문을 닫고 영업을 정지하였는데, 안순환(安淳煥)이 사장으로 있던 식도원(食道園)만은 폐점을 하지 않으면서 큰 비난을 받았다.

▲ 안순환 (安淳煥, 1871~1942)

그는 대한제국 말기에 궁중음식을 담당하던 전선사(典膳司)의 장선(掌膳) 벼슬까지 했으면서도 고종 승하 때에도 영업을 계속하였고, 순종의 서거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군중들로부터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 돈화문으로 줄지어 곡하러 가는 여학생들

한편, 왕조 멸망의 날에 걸맞은 상서롭지 못한 일들도 곳곳에서 발생해 눈길을 끌었다.

▲ 무너진 영추문(迎秋門) 성벽

강원도 평강(平康)에서는 4월 26일 오후 9시 50분, 하늘에 흰색 무지개가 떴다가 20분 후에 사라졌고 경성에서도 흰색 무지개가 나타났다. 또 27일 오전 10시경에는 경복궁 서쪽 정문인 영추문(迎秋門)의 오른쪽 성벽이 난데없이 네 칸가량 무너져 근처에서 놀던 아이가 중상을 입었다.


참고문헌:
• 每日申報. 嗚呼 大正十五年 四月廿五日 大星將落에 日月無光 (1926.04.27)
• 조선일보. 迎秋門엽 宮墻이문허저서 (192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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