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의사가 촬영한 1908년 런던 거리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4년 1월 21일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러시아의 생화학자 보리스 일리치 즈바르스키(Boris Ilyich Zbarsky, 1885~1954) 박사와 우크라이나 하르키우(하르코프) 의대의 해부학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보로뵤프(Vladimir Petrovich Vorobyov, 1876~1937)에 의해 영구보존 처리되었다.

보존처리를 시작하기 전인 1월 23일 아침까지는 러시아의 의사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아브리코소프(Aleksey Ivanovich Abrikosov, 1875~1955)가 레닌의 시신을 온전하게 방부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그는 이 작업으로 훗날 레닌 훈장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수여받는 등 큰 영예를 누렸다.

▲ 보리스 즈바르스키, 블라디미르 보로뵤프,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

이들 중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는 1908년에 유럽을 여행하였는데, 그의 동생인 드미트리 아브리코소프(Dmitry Abrikosov, 1876~1951)가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여행 중 런던을 방문해 유명 관광지와 거리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래는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가 남긴 1908년 런던의 모습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앞에서 마차를 타고 있는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의 아내 타티아나 아브릴료브나 아브리코소바(Tatiana Avrilovna Abrikosova, 1879~1973)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동생 드미트리의 모습.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는 이 사진을 찍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온라인에서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철자만 약간 다른 200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Alexei Abrikosov, 1928~2017)가 먼저 나온다. 바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아브리코소프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레닌의 시신을 보존한 소련의 영웅으로 최고의 훈장을, 아들은 냉전의 주적이었던 미국의 과학자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브리지(Westminster Bridge)에 서 있는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의 아내 타티아나와 동생 드미트리의 모습. 다리 건너 빅 벤(Big Ben)과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 보인다.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는 러시아 황실에 초콜릿을 공급하는 부유한 기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재 이 회사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초콜릿 브랜드인 '바바예프스키(Бабаевский / Babaevsky)'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 런던 최대의 공원 리젠츠 파크(Regent's Park)에서 시민들이 코끼리를 타는 모습.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의 아내 타티아나가 건너편에서 양산을 쓰고 카메라를 보며 걷고 있다.

▲ 런던의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St. James's Park)에서 여가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 이곳은 원래 왕실을 위한 정원이었으나 17세기부터 일반에도 공개되었다.

중앙에 멀리 보이는 탑은 조지 3세의 차남인 프레드릭 왕자(Prince Frederick, 1763~1827)를 추모하기 위해 1834년 4월 10일 공개된 요크 공작 기념비(Duke of York Column)이다. 당시 기념비 건립을 위해 영국 육군 전체가 하루 임금 21,000파운드(현재가치 183만 1,424파운드 / 한화 약 29억 원)를 기부했던 사연이 있다.

▲ 요크 공작 기념비와 동상

스코틀랜드 에버딘셔에서 생산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총 높이 41.99m이며, 꼭대기에 있는 프레드릭 왕자의 청동상은 4.11m이다.

▲ 런던 뉴 옥스퍼드 스트리트(New Oxford Street)의 분주한 모습.

멀리 도로 끝의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20세기 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H. G. 웰스 (H. G. Wells),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등의 예술가와 유명인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던 비엔나 카페(Vienna Café)로 1차 대전 직후인 1914년에 폐점하였다.

가까이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수제 우산과 지팡이 전문점인 '제임스 스미스&선즈(James Smith & Sons)' 매장이고, 왼쪽은 발명가 데이비드 게스테트너(David Gestetner, 1854~1939)의 '로터리 등사기(Rotary cyclostyle)'를 파는 상점이다.

당시 시점에서 보면 우산과 지팡이는 전통적인 액세서리였고 등사기는 최첨단 기기였다. 하지만 제임스 스미스&선즈 매장이 지금도 같은 자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반면, 로터리 등사기는 매장이 사라진 것을 넘어 이제는 기술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게스테트너 사는 1996년 일본 리코(RICOH)에 합병되어 현재는 NRG Group PLC로 남아있다.

▲ 뉴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지나가는 마차들. 왼쪽에 보석회사인 맵핀앤웹(Mappin & Webb)의 매장이 보인다.

맵핀앤웹은 전통적으로 왕족과 상류사회를 위한 보석을 만들던 곳으로, 프랑스의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러시아 황실과 모나코의 그레이스 여왕(그레이스 켈리)등이 고객이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s, 왕립인증서)를 수여받은 이래 현재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찰스 황태자의 로열 워런트를 수여받으며 영국 왕실이 품질과 가치를 인증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때의 맵핀앤웹은 한창 국제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 런던의 관광용 택시를 탄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와 가족들의 모습.

사진 속에 보이는 차량은 월터 버시(Walter Bersey, 1874~1950)가 개발해 1897년 8월 19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버시 전기택시(Bersey electric cab)'로 런던 최초의 전기택시였다.

▲ 택시영업 당시의 모습

최고속도 시속 19km(14km로 제한), 완충 시 주행거리 48~56km, 8마력의 전기택시는 처음에는 꽤 인기가 있었으나 납축전지 무게 711kg를 비롯해 차량 무게는 2,000kg에 달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나무로 된 바퀴가 2톤의 무게를 오래 견뎌내지를 못한데다가 배터리의 수명도 짧아 수익성이 떨어졌다. 또 짧은 주행거리와 함께 여전히 마차가 더 빨랐기에 언론의 혹평속에 1899년 8월 문을 닫게 된다.


아브리코소프 가족들이 탑승한 전기택시는 이후 관광용으로 개조되어 운행된 것으로 일반택시로 영업할 당시보다 타이어가 훨씬 두꺼워졌고 휠도 금속 재질로 대체된 것을 볼 수 있다.

▲ 런던에 소재한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궁(Palace of Westminster)앞 광장의 가로등 옆에서 포즈를 취한 알렉세이의 아내 타티아나와 동생 드미트리.

과거 가로등이 없던 18세기의 런던은 어둡고 위험한 도시였다. 밤에 나가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었기에 부자들은 하인들을 동행했지만 서민들은 해가 지기 전에 귀가하거나 횃불을 들고 길을 안내하는 '링크보이(Link-boy)'들을 고용해야 했다.

▲ Cupid as a Link Boy(1771) / by Joshua Reynolds

1807년, 런던 중심부의 '팔 몰(Pall Mall)'에서 발명가 프레더릭 윈저(Frederick Winsor, 1763~1830)가 조지 3세의 생일을 기념해 군중 앞에서 가스등을 켜는 마법을 부렸다.

▲ 2007년, 가스등을 켰던 팔몰 앞에서 200주년 기념패 제막식을 하고 있다.

이 '세기의 전환' 사건 이후 가스 가로등이 런던 시내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런던의 밤길은 안전해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간행물이었던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에 따르면, "가스등의 도입이 그 어떤 성직자의 설교나 법집행보다도 거리의 범죄를 예방하는데 더 많은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당시의 웨스트민스터 전등갓(좌)과 현재 웨일스 란디드노(Landudno) 해피밸리에 남아있는 가로등

사진 속의 가로등은 윌리엄 수그&코퍼레이션(William Sugg & Co.)에서 제작한 가스등으로 이 업체는 현재도 빈티지한 디자인과 가스등 특유의 따뜻하고 은은함을 살려 세계문화유산이나 유적의 야간조명을 밝히는 조명을 생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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