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룡 가옥(백인제 가옥)에서 열린 조선과 일본 귀부인들의 오찬회

3.1 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8월 25일 정오,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93번지에 있던 한상룡(韓相龍, 1880~1947)의 저택에서 한상룡 부부의 주최로 오찬회가 열렸다.


이날 오찬회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위하여 가정형 기숙사를 경영하는 히라오카 키치코(平岡喜知子) 여사와 중앙신문 여성기자 미야자키 사유리(宮崎小百合) 여사가 호스트.

▲ 히라오카 키치코(좌), 미야자키 사유리(우)

손님으로는 이재완(李載完) 후작부인, 이완용(李完用) 백작부인, 한창수(韓昌洙) 남작부인, 이달용(李達鎔)의 부인 등 당대의 귀부인들이 초대되었다.

▲ 오찬회에 참석한 부인들

오찬회의 요리는 조선식으로 나왔으며, 일제는 조선귀족 부인들과 일본인 여류자선가들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해 독립운동의 여파를 희석하고 내선(內鮮)인들 사이의 화합을 도모하고 있었다.

■ 사진 속의 인물들 설명

사진이 흐릿하기 때문에 번호를 매겨서 설명하면 모인 인물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①: 한창수(韓昌洙, 1862~1933) 부인, 남양 홍씨. 한창수는 이왕직장관으로 덕혜옹주의 유학과 결혼 결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관련 글: 덕혜옹주의 학창 시절)

②: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 경성유치원장.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의 원장으로 옹주의 유치원 시절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일본 여성이다.


③: 원래 사진에는 '한창수의 딸'로 표기되어 있지만 한창수의 장남 한상기(韓相琦)의 둘째 딸, 즉 '손녀 한연자(韓延子, 1908~?)'이다. (관련 글: 한창수의 유산을 놓고 벌인 가족 간의 분쟁)


④: 미야자키 사유리(宮崎小百合), 중앙신문 기자.


⑤: 히라오카 키치코(平岡喜知子), 교육자선가.


⑥: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부인 양주 조씨(1857~1926). 사진이 흐리지만 이완용 부인에 대해 쓴 포스팅에 나온 모습과 비교하면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다. (관련 글: 조선 여성 최초의 미국 방문, 이완용 부인)


⑦: 이재완(李載完, 1855~1922)의 부인, 대구 서씨(?~1923)


⑧: 한만희(韓萬熙, 1896~1941) 부인, 한만희는 경성부회의원으로 이완용의 영결식에서 영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관련 글: 이완용의 장례식)


⑨: 집주인 한상룡(韓相龍)의 딸 중 한 명. 한상룡의 자식들은 한창희(韓昌熙, 1902년생 아들), 한효순(韓孝順, 1905년생 딸), 한효남(韓孝男, 1910년생 딸), 한성희(韓盛熙, 1916년생 아들)가 있었다. ⑨의 여자아이는 나이대로 볼 때 한효남으로 보인다.


⑩: 한상룡(韓相龍)의 아들. 장남 한창희는 이 시점에 17세이므로 차남 한성희이다. 한성희는 1944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⑪: 한상룡(韓相龍)의 부인, 이용경(李龍卿, 1881~?). 이용경은 해방 후인 1959년 언론에 등장하는데, 지병을 앓고 있던 그녀(당시 79세)가 겨우 몸하나 들어가는 변소 옆 밀실에 감금되어 학대당하는 것 동네 주민들이 구출해 신고한 것.

존속학대혐의로 구속된 것은 한상룡의 장남 한창희(韓昌熙, 55)와 며느리 김숙재(金淑在, 57), 손자 한양규(韓陽圭)였다. 당대의
귀부인들을 대궐 같은 자신의 집에 초청해 오찬회를 열던 시절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초라한 말년이 된 것이다.


⑫: 이달용(李達鎔, 1883~1948)의 부인, 안동 김씨(1883~?). 이달용은 이재완의 아들. 즉 ⑦의 노부인과 ⑫의 부인과는 '고부지간'이다. 가까운 사이면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촬영한 것이 흥미롭다.

▲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한상룡 가옥(백인제 가옥) ⓒ 서울역사박물관

당시 오찬회가 열린 가희동 93번지의 한상룡 가옥의 부지는 무려 908평의 대저택이었다.

■ 한상룡 가옥(백인제 가옥) 건축개요

가옥 호칭: 재동 한상룡 가옥
건립 시기: 1913년
대지면적:
- 93번지 : 3,001.65㎡(908평)
- 94번지 : 145.45㎡ (44평)
- 103번지 : 99.17㎡(30평)
- 총 3,246.28㎡(982평)
- 무단 사용한 기존 골목길(국유지) 23.1㎡(7평) 포함하면 총 3,269.42㎡(989평)
건축면적: 571.21㎡(172.79평)
연면적: 593.48㎡(179.53평)


1913년부터 1928년까지 이곳에 거주한 한상룡은 자신이 두취(頭取, 은행장)로 있던 한성은행의 경영이 악화되자 책임을 지는 의미로 이 집을 내놓았다.

▲ 사랑채의 문창살 모양이 1919년 오찬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wikimedia

1935년, 한성은행은 이 저택을 개성의 청년갑부 최선익(崔善益, 1905~?)에게 팔았으며, 최선익은 저택의 토지를 분할해 1944년 백병원 설립자로 유명한 백인제(白麟濟, 1899~?)에게 대부분(737평)을 넘겼다.

이후 2009년 서울시의 소유가 되어 2015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할 때까지 70여 년간 백인제 일가의 소유로 가장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오늘날 이곳이 최초 건축한 한상룡 가옥이 아닌 '백인제 가옥'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다.

한상룡 가옥(백인제 가옥) 연표

• 1913년 7월 3일: 완공 후 한상룡 거주.
• 1928년 6월 29일: 한성은행으로 소유권 이전.
• 1935년 1월 29일: 최선익(언론인)으로 소유권 이전.
• 1944년 9월 1일: 백인제(백병원 설립자)로 소유권 이전.
•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 지정.
• 2009년 11월 30일: 서울특별시로 소유권 이전.
• 2015년 11월 18일: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

 

▲ 상공에서 본 한상룡 가옥. 노란 부분은 분할된 롯데 영빈관. ⓒ naver map

한편 최선익이 분할한 나머지 토지와 건물은 여러 차례 매각되다가, 현재는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매입해 철거 후 롯데그룹 영빈관을 건립하였다.


- 참고문헌:
• 한상룡 가옥(현 가회동 백인제 가옥)의 원형과 조영개념 (박상욱)
• 조선일보. 존속학대로被檢, 故한상룡의손자 (1959.09.07)
• 동아일보. 한창수남작가재산전 (193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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