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중구문화원의 옛 주인, '다테이시 요시오(立石良雄)' 가옥

얼마 전까지도 부산광역시 중구는 부산 16개 구군중 유일하게 문화원이 없는 곳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지난 2021년 11월 25일, 드디어 문화원 개원소식을 알렸는데 기사 속 사진에 나온 건물(부산 중구 복병산길 20) 사진을 보면 신축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 새롭게 개원한 중구문화원 ⓒ 부산 중구

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에서는 이곳을 건축물대장에 따라 1958년 10월 30일에 지은 '신정숙 가옥(링크)'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가옥의 구석에 있는 창고로 보이는 높은 건물은 누가 봐도 일본식으로 지어진 건물이기에 부연설명으로 일제시대의 건축물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 일본식 창고건물(좌)과 서양식 안채 ⓒ 부산 중구문화원

서양식 건물과 일본식 건물이 혼재된 이 가옥의 정체는 사실 일제시대에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 일본인 사업가 '다테이시 요시오(立石良雄)'의 저택이었다.

■ 부산 경제계의 거물, 다테이시 요시오

1910년대 조선에서는 가정의 조명으로 비싼 등유램프 대신 양초가 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가내수공업으로 소량만이 생산되고 있었고 모자란 대부분의 수요는 수입 양초로 충당하고 있었다.

▲ 다테이시 요시오(1883~1941)

이즈음 오사카의 양초제조업체 마츠오 상점(松尾商店)의 직원이었던 다테이시 요시오는 조선 내에서 양초를 대량 생산하면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보고 1911년 바다를 건너와 부산의 부평정(富平町)에 지점을 열고 양초공장을 가동했다.

즉 그는 조선에 최초의 근대식 양초제조공장을 세운 인물이기도 한 것이다.

▲ 다테이시 가옥은 '카시이 겐타로 가옥'과 도보로 불과 5분 거리. 이곳이 일본인 부자들의 주거지였음을 말해준다.

성공을 거둔 다테이시 요시오는 1918년에는 마츠오 상점 부산지점을 자신의 이름을 딴 '다테이시 상점'으로 변경하고 양초의 재료로 들여오던 석유판매업에 전념해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절묘하게 석탄에서 석유로의 에너지 전환기를 포착한 그는 영도에 15,000평에 달하는 정유공장과 중유저장시설을 세우고 조선의 남반부에 석유를 공급하면서 재벌의 위치에 올랐고 1929년에는 부산역 앞에 '부산 최초의 주유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 포항 구룡포에도 다테이시 상점의 흔적이 2010년까지 남아있었다. 현재 일본인 가옥거리 정문(아래) 자리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다테이시의 정유탱크(위)가 있던 곳이다.


이처럼 부산 근대 경제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면서 명성을 쌓던 시기에 지은 것이 바로 다테이시 요시오 저택이다. 건설 당시에는 창고 건물 외에도 일본식 저택이 한채 더 있었으나, 현재는 외관이 완전히 개조되어 당시의 모습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일제시대의 다테이시 저택. 오른쪽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으나 왼쪽의 일본식 가옥은 개조되었다. ⓒ 釜山でお昼を


이제는 부산 중구문화원이 되면서 과거에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주택이라 보지못했던 내부의 모습을 직접 방문해서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문화원 측에서 공개한 영상을 통해서도 백 년 전의 흔적을 감상할 수 있다. (부산 중구문화원 소개 영상)

■ 전후 삼대째 이어가는 가업

1941년 9월, 다테이시 요시오는 경성에 출장을 갔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재계에 충격을 주었다.

아들 다테이시 신키치(立石信吉, 1908~1984)가 가업과 저택을 물려받았지만, 일제의 패망 후 부산에 들어온 미군정청에 체포당한 후 저택을 포함한 자산을 몰수당하며 1947년에야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서양식으로 지어진 안채는 미군장교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일반에 반출되었고, 중구에서 문화원을 만들기 위해 인수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세월이 느껴지는 내부천장과 아름다운 정원 ⓒ 부산 중구문화원

빈털터리로 고향으로 돌아간 다테이시 신키치는 1951년 석유 운송업체인 아사히 탱커(旭タンカー, ASAHI TANKER)를 설립하며 재기에 성공하였고, 2001년에는 그의 아들 다테이시 노부요시(立石信義)가 회장직에 앉는 등 삼대째 석유와 관련된 가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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