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딸들 ① 이해승의 딸, 이봉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걸쳐 조선귀족과 친일파의 자제들은 큰 번영을 누렸는데, 대부분 아들들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딸이 없었던 것은 아닐 텐데, 이는 아무래도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드물었던 시대상과 딸은 출가외인으로 여겨졌던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던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에서는 많이 드러나지 않은 조선귀족과 친일파들의 딸을 다루어본다.

■ 이해승(李海昇, 1890~1958)의 딸

조선 왕족의 종친이었던 이해승은 대한제국 시대에는 세습으로 높은 벼슬을, 한일병합 직후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후작 작위와 16만 8000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 이해승의 재산을 놓고 정부와 후손의 소송이 오고가는 중

그의 가계도를 찾아보면, 사람들이 주로 참고하는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와 나무위키 모두 이해승의 자식은 아들만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위키백과(좌), 나무위키(우) 모두 아들만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승에게는 '이봉주(李鳳柱)'라는 이름의 딸도 있었다.

(※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 출신 이봉주와 이름의 한자까지 똑같은데, 이봉주도 왕족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장녀였던 이봉주는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경성유치원을 졸업하고, 열두 살의 나이로 1926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속보통학교 5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는데 이를 통해 1915년생임을 추정할 수 있다. 장남 이완주가 1908년생이니 꽤 나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다.

배꽃같이 흰 의복에 귀여운 얼굴을 가진 작은아씨 이봉주 양입니다.

조선귀족 중에도 가장 이왕 전하와 근친인 이해승 후작의 맏따님으로 방년 열두 살인 꽃봉오리 같은 아기씨이니, 이제 여자고보 부속보통학교 오년생이올시다.

원래 고귀한 가정에 태어나서 어려서 경성유치원을 졸업한 이후로는 가정교사를 고빙하여 예의범절과 보통교육을 가르친 후 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이니,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님의 사랑과 집안의 귀여움을 한 몸에 싣고 가장 귀족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샛별 같은 눈과 영리한 얼굴은 천부의 재질이 풍부하여 봉주 양의 학급을 맡아 가르치는 조재호(曺在浩) 선생님도 이양의 뛰어난 재주를 칭찬하며, 특히 재봉수예(裁縫手藝)와 창가(唱歌), 도화(圖畫), 습자(習字)등 예술 방면의 어린싹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아직 나이 어리니 세상을 모르고, 귀한 집에서 교양을 받으니 깨끗하고 순결한 소질을 겸하였습니다. 근친(近親)되시는 故이왕 전하의 승하를 애통해하는 봉주 양은 흰의복이 이를 상징하매 특히 보는 이의 눈을 끌었습니다.

선생님의 친절하신 지도와 부모님의 정에 넘치는 사랑 가운데서 고이고이 커가는 양의 전도(前途)야말로 광명이 찬란히 빛나더이다.

【매일신보 1926.11.07】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특별한 이력은 없이 칭찬이 주를 이루는 소개글인데, 이 기사 이후 이봉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 이해승의 딸, 이봉주(1915~?)

명문가 집안인데도 결혼 이야기나 성장 후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요절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혹은 부친 이해승이 해방 후 납북되었을 때 함께 북한 지역으로 올라갔을 수도 있고, 다른 남자 형제들처럼 남쪽에 남아 평범한 삶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생존해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친일파 후손으로 낙인찍힌 상황이었기에 굳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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