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던 첩에게 뒤통수 맞은 민영찬

망국의 청년 외교관과 기생의 만남

 

구한말 관료이자 일제시대 고위직을 지낸 민영찬(閔泳瓚, 1873~1948)은 1902년 4월 19일부터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정실부인이 아닌 '진주(晋州)댁'이라는 첩과 함께 현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좋았던 시절도 일본과의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며 끝이 난다.

▲ 1900 파리 만국박람회 특파대사 시절의 민영찬

프랑스와의 외교관계가 중단되자 진주댁을 먼저 조선으로 돌려보낸 민영찬은 허탈감에 미국과 중국 등지를 떠돌다가 상하이의 기방에 출입하였고, 그곳에서 이름 높던 17세의 기생 '임보(林寶)'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바로 민영찬의 중국인 후실로 기록되어 있는 '호보영(胡寶英)'이다.

비록 약소국으로 전락했지만 왕실의 종척이자 백만장자인 외교관을 만난 것은 일개 기생이었던 호보영에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녀는 이를 놓칠세라 민영찬을 따라 조선땅을 밟았고, 첩들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으며 딸까지 낳았다.

- 관련 글: 민영찬과 중국인 첩의 딸


조선 최고 부자의 몰락

 

민영찬은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양반 가문인 데다가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일가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함께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맛보았다. 거기다가 아들 둘마저 방탕한 생활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자 급기야 익선동의 대저택마저 내놓고 성북동의 별장으로 이사하는 등 점점 곤궁한 상태가 되었다.

▲ 민영찬 익선동 저택과 대문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고 가족도 지긋지긋해진 민영찬은 애첩 보영과 조선인 첩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하지만 베이징에서는 마음은 편했을지 몰라도 타지인지라 돈이 더 필요했다.

당시 그는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매달 나오는 250원을 받아 100원을 생활비로 사용하였으나 이는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첩을 거느린 전 백만장자의 씀씀이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1930년대 교사 월급 70원)


결국 민영찬은 가장 신뢰하던 호보영을 조선으로 보내 처분할 수 있는 모든 물건과 부동산을 정리하고 올 것을 지시했다.


중국인 첩의 은밀한 계획

 

조선에 온 호보영은 무슨 이유인지 본가에는 얼굴을 비추지도 않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팔기 시작했다. 민영찬의 둘째 아들 민홍식이 이를 알아차리고 막아보려 하였으나 지금처럼 통신이 원활했던 것도 아니고 부친의 인감도장까지 가지고 있는 데에는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조선총독부에서 민영찬에게 지급하는 중추원 참의 퇴직금 3,000원까지 알뜰하게 받아가려고 하였으나 총독부가 본가와 베이징의 민영찬에게 직접 퇴직금을 전달한다는 지침이 있어서 이것까지 챙기지는 못했다.

▲ 익선동 저택의 일본식 정원

하지만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고 1만여 원의 돈을 손에 쥔 그녀는 1934년 2월에 조선땅을 떠나 어디론가 잠적했다.

한편, 가장 믿던 애첩을 조선에 보낸 민영찬은 두 달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그제야 조선인 첩을 본가로 보냈는데 '이미 호보영은 조선을 떠난 지 오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애인과 고향으로 도주한 호보영

 

많은 재산을 털린 순간에도 민영찬은 호보영이 돈을 들고 오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것이라고 믿고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시절 사랑에 빠져 낯선 타국까지 와서 함께 30여 년을 살며 딸까지 낳고, 그 딸도 손주를 낳으며 조강지처나 다름없이 살던 그녀가 '도망을 쳤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홍삼 밀조자였던 김모라는 조선인 남자와 눈이 맞아 함께 고향 상하이로 도망친 상황이었다.

▲ 60대의 민영찬과 40대의 호보영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민영찬. 그에게 청년 외교관이던 시절부터 사랑으로 신뢰해온 애첩의 배신은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민영찬은 분명 '호보영이 못된 자의 꼬임에 빠져 약점을 잡혀 끌려갔을 것'이라고 믿고 여비를 마련해 상하이로 쫓아가 수소문 끝에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다시 재회한 호보영은 민영찬을 아직 이불도 개지 않은 침실로 들어오게 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대감님 용서해주십시오. 대감께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는 보다시피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지난 30년간의 사랑과 추억을 되찾고자 상하이까지 쫓아온 민영찬은 그저 묵묵히 앉아있다가 쓸쓸히 발길을 돌려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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