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대한제국(조선)의 풍경 ②

▲ 경성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전경. 막대한 관비를 들여 일본으로 유학 가는 대신, 조선 내에서 각 산업의 업무에 종사할 인원을 양성하는 목적의 기관으로 1907년 설립되었다.

▲ 공업전습소의 철공장.

▲ 공업전습소의 직물공장.

▲ 공업전습소의 화학실.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년에 설립된 국립병원으로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서울대학교 의학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흥선대원군 묘(興宣大院君墓).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로 최초 고양군 공덕리에 조성했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했으며, 1966년 4월에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다. 사진은 파주군 대덕리에 있던 시기로 추정된다.

▲ 마포 부근의 도로.

독립문(獨立門). 1897년에 완공된 기념문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조공체계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협회의 주도로 명나라 사신을 맞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기둥의 뒤에 건설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러시아의 건축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Afanasii Ivanovych Seredin-Sabatin, 1860~1921)이 담당하였는데, 그는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관련 글: 러시아 공사가 촬영한 사진 속 공사관 건설모습


독립문 앞에 보이는 건물은 사신이 묵던 모화관(慕華館)으로 갑오경장 이후 독립관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고, 1997년 복원되어 서대문 독립공원 현충사로 쓰이고 있다.

- 관련 글: 조선호텔 터와 주변의 변천사


▲ 목선을 타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

용산한강철교(龍山漢江鐵橋). 용산철교 또는 한강철교라고도 불리는 교량으로 한강에 놓인 최초의 교량이다.

1897년 착공하였으나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난항을 겪다가 일본에 부설권을 넘긴 후 1900년 7월 준공되었다. 이로써 서울-인천 간 12시간이 걸리던 거리가 1시간으로 단축되었으며, 수송량이 증가함에 따라 이후 2개의 철교가 더 증설되었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15분에 3개의 철교가 모두 폭파되었지만 전후 복구하였으며, 2006년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 용산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 정문. 1903년 12월 설치된 것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군 조직을 확대개편한 것이다.

용산인쇄국(印刷局). 각종 인쇄를 담당하던 관영인쇄소로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 직영으로 각종 문서와 책자를 인쇄하였다.

▲ 인쇄국 공장내부 모습.

▲ 건축 중인 용산의 통감관저(統監官邸). 지금의 남산인권숲에 있던 통감관저와는 별도로 운영된 건물이다.

제물포(濟物浦) 항구. 고려시대부터 해상교통의 요지로 개항시기에는 각종 물류의 창구역할을 했던 곳으로 1914년에는 인천부로 승격되었다.

▲ 제물포 항구에서 본 인천등대(仁川燈臺). 1903년 4월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근대식 등대로 팔미도(八尾島)에 있다고 해서 '팔미도 등대'라고도 불린다.

6.25 전쟁 당시 연합군 함대를 인도하여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2003년에 지어진 새로운 팔미도 등대에게 임무를 넘기고 유적(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0호)으로 보존되고 있다.


주안염전(朱安鹽田). 삼국시대부터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는 자염산지로 유명했던 인천은 1907년부터 국내 최초의 근대식 천일제염 방식이 도입된 주안염전을 건설하였다.

주안은 조수간만의 차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내만 갯벌로 인해 염전 설치가 쉬웠고, 경인선으로 연결되어 생산된 소금의 수송에도 유리했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국가수출산업단지 제5단지의 설립으로 주안염전은 폐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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