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슬람 혁명 후, 이란 여배우들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

 

파르바네 마수미(Parvaneh Masoumi | پروانه معصومی)

 

▲ 파르바네 마수미(1946~ )

1946년 3월 1일생으로 영화 '비타(Bita, 1972)'로 데뷔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직전인 1977년 영화 '크로우(The Crow)'를 끝으로 몇 년간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혁명정부가 기존에 활동하던 여배우들의 영화출연을 막았기 때문이다.

▲ 혁명 전 마지막 출연작 'The Crow(1977)'

결국 혁명 이후 7년이 지나서야 키우마르스 푸라흐마드 감독이 제작한 '다투라(Datura, 1984)'로 복귀하게 된다.

▲ 현재 모습

복귀 후에는 왕성한 활동으로 이란 최고의 영화제인 파즈르 국제영화제(Fajr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크리스털 시모르그 여우주연상(1985, 1988)을 2회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샤흘라 리아히(Shahla Riahi | شهلا ریاحی)

 

▲ 샤흘라 리아히(1927~2019)

1927년 2월 7일생으로 이란의 영화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한 인물.

17세의 나이에 연극무대로 연기를 시작한 그녀는 1951년 '황금의 꿈(Golden Dreams)'으로 데뷔하였다.

무엇보다 1956년에는 영화 '마르얀(Marjan)'을 감독하였는데, 이는 이란 영화 역사상 최초의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 말년의 모습. 2019년 12월 31일 별세했다.

그녀 역시 혁명 전인 1975년부터 1987년까지는 기존영화인 퇴출정책으로 영화출연이 없는 공백기를 보내야 했다.


호마 루스타(Homa Rousta | هما روستا)

 

▲ 호마 루스타(1944~2015)

1944년 9월 26일생으로 테헤란 예술대학 졸업 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극예술학교(Bucharest School of Dramatic Arts)까지 유학을 다녀왔다.

졸업 후 베를린에서 살 계획이었으나 고국 이란으로 돌아와 연극학과에 다시 들어갔고, 1971년 영화 '유리벽(The Glass Wall)으로 데뷔했다.


▲ 1971년, 잡지표지에서 다리를 드러낸 모습

호마 루스타 역시 1978년부터 1989년까지 영화출연이 금지되면서 경력의 공백기로 남아있다.

복귀 후에는 여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최고 권위의 파즈르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르는 활약을 보이는 등 존경받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 혁명 전과 대조되는 호마 루스타의 모습

말년에는 미국 LA의 한 병원에서 투병하다가 2015년 10월 25일 별세했으며, 이란 영화인들의 깊은 애도 속에 시신이 고국까지 운구되어 베헤스테-자흐라(Behesht-e Zahra) 공동묘지의 예술인 구역에 안장되었다.


파크리 코르바쉬(Fakhri Khorvash | فخری خوروش)

 

▲ 파크리 코르바쉬(1929~ )

1929년 5월 31일 생으로 이란의 영화배우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연극으로 시작해 1958년 사데그 바라미 감독의 영화 '보흘(Bohloul)'로 데뷔했으며, 1971년 세파스 영화제(Sepas Film Festival)에서 '미스터 나이브(Mr. Naive)'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로 파크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월드스타로 거듭났다.


▲ 1974년, 이란의 마지막 왕비(오른쪽) 파라와 만나는 이란 배우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가 파크리 코르바쉬

1970년대 초의 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지금과는 달리 노래, 춤, 에로틱한 장면으로 가득한 '필름파르시(filmfarsi)'라는 장르가 유행하며 이란문화부의 경고를 받곤했는데 그녀는 이런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 1972년, 영화 'Shir-too-shir'의 포스터. 속옷만 입고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파크리 코르바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 나온 여배우들과는 달리 혁명 후에도 경력이 끊기지 않고 계속 활동했던 몇 안되는 배우일 정도로 국내외적 명성이 높았다.

▲ 전성기와 대조되는 마지막 출연작의 한장면

2005년 마지막 출연작인 '작은 키스(A Little Kiss)'이후로 은퇴하였으며, 2010년 이후로는 자녀들이 있는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자흐라 호슈캄(Zahra Khoshkam | زری خوشکام)

 

▲ 자흐라 호슈캄(1947~ )

1947년 12월 8일 생으로, 영화감독인 남편 알리 하타미(Ali Hatami, 1944~1996)의 성을 따라 '자흐라 하타미'로도 알려져 있다.

이슬람 혁명 전에는 이란국립발레단의 교육과정을 마쳤으며 런던으로 발레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영화에 매료되어 배우로 데뷔했는데, 연기력이 출중해 이란영화의 미래를 빛낼 신인배우로 큰 주목을 받았다.

▲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러브씬

그런 그녀가 1971년, 당시 이란 영화계의 최연소 감독이었던 알리 하타미와 결혼을 발표한 것이다.

인기가도가 보장되어 있던 여배우의 갑작스러운 결혼소식은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는데, 섹시한 이미지로 활동했던지라 '감독이 누드사진이라도 가진 게 아니냐'라는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 과감한 노출을 했던 자흐라 호슈캄

이런 소문을 일축하고 결혼 후에는 '조신하게 남편의 연출작에만 출연할 것'을 공언했으나 하필 이슬람혁명과 시기가 맞물려 기존 여배우들의 출연이 금지되면서 영화계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남편이 요절하면서 영화출연이 더 멀어지는 듯했지만 90년대 이후 영화계로 복귀했다.

현재는 그녀의 딸, 레일라 하타미(Leila Hatami)가 이란영화계를 넘어 월드스타가 되면서 손꼽히는 영화인 가문이 되었다.

▲ 현재의 자흐라 호슈캄과 딸 레일라 하타미

레일라 하타미는 2011년 한국에도 개봉된 바 있는 아시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A Separation)'에 출연하였고, 이 영화는 제61회 베를린 영화제(황금곰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와 제84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휩쓸었었다.

▲ 201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레일라 하타미 (가운데 전도연의 우측 두번째)

이후 201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레일라 하타미는 심사위원장과 인사를 나누며 '뺨키스'를 했다가 이란 국민들의 비난에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는데, 모친 자흐라 호슈캄의 젊은시절 영화장면과 비교하면 이란의 시계가 얼마나 거꾸로 달리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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