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독일 유대인 빈민굴에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 창업주의 생가

18세기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Frankfurt am Main)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유덴가세(Judengasse, 유대인 골목)'라 칭해진 게토에 격리되었다.

당시 이곳에 살던 약 3,000명의 유대인들은 공원과 카페, 식당에 들어갈 수 없었고 두 명이 함께 길을 걸을 수도 없었다. 또한 기독교의 기념일과 일요일, 그리고 야간에는 이 골목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 1862년, 프랑크푸르트 유대인골목

이 좁아터진 빈민굴에서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부를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출발했다. 가문의 은행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1744~1812)가 태어난 것이다.

아래는 1935년, 사진작가 제임스 아베(James Abbe, 1883~1973)가 프랑크푸르트에 남아있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생가를 방문해 촬영한 것이다.

▲ 로스차일드 금융가문의 창업주인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생가.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환전상이자 옷감 상인이었던 암셀 모시스 로스차일드(Amschel Moses Rothschild, 1710~1755)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의 성은 선조인 아이작 엘차난(Isaak Elchanan)이 살았던 집에서 유래했다.

▲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

당시에는 집에 물건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아이작은 그의 집을 '붉은 방패'라는 뜻의 '춤 로텐실트(zum Roten Schild)'로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오늘날의 '로스차일드'라는 성이 유래되었다. 이후 붉은 방패의 집을 떠난 이후에도 가문은 로스차일드라는 성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 1층 로비의 모습. 구석에 난방 혹은 물을 끓이는 등의 용도로 보이는 아궁이가 보인다.

▲ 1층 로비 안쪽에서 본 입구. 왼쪽에 출입할 때 손을 씻는 곳이 설치되어 있다.

▲ 4층에 설치된 가정용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Synagogue)'라고도 불린다.



▲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가 담긴 문장(紋章).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환전상으로 시작해 골동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독일의 소국 헤센카셀 방백국(Landgrafschaft Hessen-Kassel)의 상속자인 빌헬름 공을 소개받았다.

그는 훗날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관리해줄 궁정 유대인(Court Jew)으로 마이어 암셀을 고용하였기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고용인의 자격으로 헤센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를 집에 걸 수 있었고, 지금도 로스차일드가의 문장에 남아있다.

▲ 헤센카셀 방백국 문장

로스차일드가의 문장은 기본적으로 독일의 문장화가였던 요한 시브마허(Johann Siebmacher, 1561~1611)가 그린 프로이센의 문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협력(concordia)', '진실(integritas)', '근면(industria)'이라는 신조가 적혀있고 가문의 시작을 알리는 붉은 방패(zum Roten Schild)가 가운데에 있다.

▲ 요한 시브마허가 그린 프로이센 문장

방패에 그려진 손이 쥐고 있는 5개의 화살은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빈, 나폴리로 흩어진 마이어 암셀의 5명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 건물 2층의 거실.

▲ 2층 창가에 붙어있는 의자. 앉아서도 밖을 볼 수 있게 나무로 만든 단 위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몸이 불편하고 연로한 가문의 수장을 위해 만들어 둔 것으로 보인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사망한 후에는 장남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Amschel Mayer Rothschild, 1773~1855)가 이 집에 거주했다.

▲ 장남 암셀 마이어 로스차일드(Amschel Mayer Rothschild, 1773~1855)

그는 엄청난 부를 쌓았음에도 죽을 때까지 이곳을 지켰으며, 가문의 모든 결혼식도 프랑크푸르트 저택의 유대교 회당에서 치르게 했다.

▲ 견고한 지하실의 모습.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탄압을 받아온 만큼 대피를 하거나 통로를 마련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었다.

19세기 말 유덴가세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철거되었지만, 이 저택은 명성에 걸맞게 박물관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제2차 대전의 폭격까지는 피할 수 없었고, 종전 후 재건된 프랑크푸르트 거리에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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