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제9회 칸영화제에 참석한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은 스웨덴 출신으로 유럽 영화계에서 성공을 거둔 후 1939년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성공이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1940년대 할리우드를 평정한 버그만은 1950년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바로 영화 '스트롬볼리(Stromboli)' 촬영 중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와 깊은 관계를 가진 사건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 다 배우자가 있는 불륜이었고,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가스등(1944), 성 메리 성당의 종(1945), 잔다르크(1948). 모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가스등으로 버그만은 194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버그만은 주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연약하고 순수한 역을 맡아왔고, 1948년에는 프랑스의 영웅이자 성녀 '잔 다르크(Joan of Arc)' 역할까지 소화한 상황이어서 스크린의 이미지에 익숙한 대중은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고국 스웨덴 언론마저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혹독한 기사를 쏟아내는 통에 사실상 그녀는 쫓겨나듯 미국을 떠나야 했다.

아래의 사진은 1956년 4월 23일부터 5월 10일까지 열린 제9회 칸영화제에 등장한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모습. 두 사람은 1952년 결혼식을 올린 상황이었다.

▲ 칸영화제 리셉션장에 도착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제작자 대릴 F. 재넉(Darryl F. Zanuck, 1902~1979)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는 21세기 폭스(21st Century Fox)를 설립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20세기 스튜디오(20th Century Studios).

▲ 칸영화제의 리셉션에서 벨기에 소설가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 1903~1989)이 잉그리드 버그만 일행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버그만의 옆에 앉아있는 흰색 옷을 입은 남성이 그녀의 불륜 상대이자 두 번째 남편인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이다.

대릴 F. 재넉과 한자리에 앉은 잉그리드 버그만로베르토 로셀리니.

▲ 손에 담배를 든 잉그리드 버그만대릴 F. 재넉과 저녁식사 중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에서 담배는 버그만이 들고 있지만 재넉이야말로 골초로 유명한 인물이었고, 사망도 흡연으로 인한 폐렴이 원인이었다.

▲ 잉그리드 버그만이 몸을 돌려 옆 테이블에 있는 프랑스 배우 자크 베르주라크(Jacques Bergerac, 1927~2014)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버그만을 돌아보는 여성은 그의 아내인 미국배우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 1911~1995)이다.

194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로저스는 베르주라크와의 결혼이 4번째였고 무려 16세 연상이었다. 스캔들 사건 때문인지 진저 로저스가 버그만을 경계하듯 노려보는 느낌으로 사진이 촬영된 것이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버그만과 로저스 둘 다 옆에 있는 남편들과 1957년 이혼하였다.

▲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을 방문한 로베르토 로셀리니잉그리드 버그만 부부.

당시 대중들은 버그만을 성녀로 보았으나 사실 그녀는 전성기 시절에 함께 작업한 감독을 비롯해 다수의 남자배우들과 불륜에 빠졌다. 전후 보수주의의 시대에 이 같은 사실은 용납되지 못했기에 비난을 들어야했고, 훗날 버그만은 "나는 성녀가 아니라 여자일 뿐이에요"라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 경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칸의 크화세뜨 거리(Boulevard de la Croisette)를 걷는 잉그리드 버그만.

잉그리드 버그만이 미국 영화감독 오토 프레민저(Otto Preminger, 1905~1986)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프레민저 감독은 1956년 칸영화제의 심사위원이었다.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남자는 1952년부터 1972년까지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로베르 파브르 르 브렛(Robert Favre Le Bret, 1904~1987)이다. 그는 프랑스 주간지 파리매치(Paris Match) 기자출신으로 칸영화제의 설립을 제안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며, 1972년부터 1984년까지는 칸영화제 회장을 역임했다.

▲ 요트에 탄 잉그리드 버그만이 식당을 떠나기 전 취재 중인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 보트에 탑승한 잉그리드 버그만의 왼쪽으로 로베르 파브르 르 브렛(Robert Favre Le Bret) 칸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이탈리아 영화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가 앉아있다.

▲ 이탈리아 영화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옆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잉그리드 버그만.

▲ 영화제 기간 중 열린 파티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할리우드 진출 당시, 그녀는 영어를 할 줄 몰랐고 눈썹도 짙은 데다 당시로서는 키가 너무 커서(175cm) 미국에서의 성공에 의문부호가 붙었다. 게다가 너무 독일스러운 이름 탓에 개명 제안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그대로 도전에 나섰다.

▲ 칸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데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에 도착한 잉그리드 버그만로베르토 로셀리니.

▲ 영화 관계자와 취재진들로 가득한 팔레 데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 et des Congrès).

1956년 칸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낸 후 할리우드로 복귀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영화 '아나스타샤(Anastasia, 1956)'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74)'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역사상 아카데미 연기상을 3회 이상 수상한 단 3명의 여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 아카데미 연기상 최다수상 여배우들

나머지 두 명은 여우주연상만 4회를 수상한 캐서린 햅번(Katharine Hepburn, 1907~2003)과 버그만과 마찬가지로 여우주연상 2회와 여우조연상 1회를 수상한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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