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파리 코뮌을 담은 합성사진, '코뮌의 범죄'

1871년 3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왕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봉기하면서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초기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파리는 완전히 해방구가 되었으며, 시민들은 평의원 선거까지 치르며 3월 28일에는 파리 시청 앞에서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라는 혁명정부의 공식적인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리코뮌은 5월 28일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70일) 동안만 존속되었다.

▲ 폭도들이 파리의 건물에 불을 지르는 모습

정부군이 5월 21일 시내로 돌입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지만, 코뮌 측은 수많은 건물을 파괴하고 인질들을 학살하는 이른바 '피의 일주일(Semaine sanglante, Bloody Week)'이라 불리는 저항을 벌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래는 사진작가 어니스트 외젠 아페르(Ernest Eugène Appert, 1830~1890)가 당시의 참상을 담은 '코뮌의 범죄(Crimes de la Commune)'라는 기록사진이다.

▲ 1871년 3월 18일, 코뮌 측에 의해 처형당하는 자크 레옹 클레망 토마스(Jacques Leon Clément-Thomas)와 클로드 르콩트(Claude Lecomte) 장군. 두 사람은 폭동 후 처음으로 살해된 사람들이었다.

로케트 교도소(Prisons de la Roquette)에 감금된 조르주 다르부아(Georges Darboy, 1813~1871) 파리 대주교.

다르부아 대주교는 '피의 일주일' 기간 동안 처형당했고, 자신을 살해하는 코뮌 측에게도 축복과 용서의 말을 남겼다. 그의 시신은 수습되어 6월 7일 엄숙한 장례식을 치렀다.

▲ 1871년 5월 23일, 생트펠리지 교도소(Prison Sainte-Pélagie)에서 살해당하는 정치가 귀스타프 쇼디(Gustave Chaudey).

▲ 1871년 5월 24일, 로케트 교도소(Prisons de la Roquette)에서 저명인사 인질들을 처형하기 직전의 모습. 코뮌 측의 리더 중 한 명인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의 명령으로 처형이 승인되었다.

▲ 1871년 5월 24일, 로케트 교도소(Prisons de la Roquette)에서 코뮌 측에 살해된 성직자와 저명인사들

이들은 파리 대주교였던 조르주 다르부아(Georges Darboy), 법학자 루이 베르나르 봉장(Louis Bernard Bonjean), 가스파르 드게리(Gaspard Deguerry) 신부, 생트 쥬느비에브(Sainte Geneviève)학교의 총장이었던 레온 뒤쿠드레이(Léon Ducoudray), 알렉시 클레르크(Alexis Clerc) 신부, 미셸 알라르(Michel Allard) 신부였다.

▲ 1871년 5월 25일, 아르퀘유(d'Arcueil)거리에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을 학살하는 모습.

▲ 1871년 5월 26일, 코뮌 측이 인질 62명을 학소 85번가(85 Haxo Street)에서 학살하는 모습. 오늘날 이 거리는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인질의 집(Villa des Otages)'이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 1871년 11월 28일, 베르사유의 사토리(Satory) 군사기지에서 파리코뮌의 주동자였던 루이 로셀(Louis Rossel, 1844~1871),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 1845~1871), 피에르 부르주아(Pierre Bourgeois, 1848~1871)가 처형되는 모습.

루이 로셀과 테오필 페레의 시신은 유족들이 거두어가 묘지가 조성되었으나 고아였던 피에르 부르주아의 시신은 인수해가는 사람이 없었고 생루이 묘지(Cimetière Saint-Louis)에 묻힌 것으로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초기의 합성사진

 

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사실 이 사진들은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즉 합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코뮌의 범죄'라는 제목에서도 의도가 느껴지듯이 사건을 더 과장되고 잔인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 그림과는 달리 사진은 당시나 지금이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전달한다고 믿게 하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사진작가 아페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배우를 고용해 연기를 펼치게 하였고, 이들의 모습에 피해자들의 얼굴을 정교하게 오려넣은 다음 실제배경에 붙여 넣는 방식으로 기록물을 제작했다.

▲ 사진을 조합하는 포토몽타주는 예술작품이라면 몰라도 기록물로는 적절하지 않다.

아무리 진실을 추구하며 만들었다고 해도 실제내용과 다른 묘사는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가리는, 지금도 비난을 받을만한 연출사진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오래된 연식 탓인지 이 사진들은 지금도 세계각국에서 파리 코뮌의 실제 순간이 촬영된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