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러시아 황태제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장례식

1899년 6월 28일 아침, 조지아 아바스투마니(Abastumani)의 황량한 도로에서 농민으로 보이는 한 노파가 피범벅이 된 옷을 입은 청년을 껴안고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절명한 것으로 보이는 청년의 이름은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Grand Duke George Alexandrovich). 바로 러시아 제국의 황위 계승자였다.

게오르기 대공은 알렉산드르 3세(Alexander III)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바로 위의 왕자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요절하면서 사실상의 차남이 되었다.

▲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Grand Duke George Alexandrovich of Russia, 1871~1899)

이후 차르가 된 니콜라이 2세(Nikolai II)가 아들이 없었던 관계로, 게오르기 대공은 러시아 제국의 황위 계승자를 뜻하는 '체사레비치(Tsesarevich)'로 지정되었다.

▲ 게오르기 대공의 임종을 지킨 안나 다소에바

사망 당일, 게오르기 대공은 가솔린 엔진이 달린 세발 오토바이를 타고 궁전에서 출발해 고갯길을 달린 다음 다시 궁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려지며 그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현지의 농민 안나 다소에바(Anna Dasoeva)는 즉시 달려갔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왜 그러십니까?"

게오르기는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무것도 아닐세"라고 대답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 게오르기 대공이 탔던 오토바이

다소에바는 게오르기를 땅에 눕히고 근처의 강에서 물을 떠 입을 축여주었지만 목에 출혈이 심해 마시지 못했고, 이내 얼굴에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대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 오토바이에서 내린 지 5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 게오르기 대공(Grand Duke George Alexandrovich of Russia, 1871~1899)이 거주했던 조지아 아바스투마니(Abastumani)마을의 풍경. 그는 1891년부터 8년간이나 결핵치료를 위해 이곳에 머물렀는데, 아바스투마니가 19세기부터 온천과 온화한 기후로 질병치료의 최적지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산골의 작은 촌락이었던 아바스투마니는 황태제(皇太弟)가 머물면서 빠르게 인구가 늘기 시작해 인기휴양지가 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다시 쇠퇴하였다.

▲ 게오르기 대공이 거주했던 아바스투만 궁전(Abastuman Palace)의 출입문.

궁전은 통나무로 지어졌으며 못은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 자연에 가까운 집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게오르기 대공이 아꼈던 궁전 내 동물원의 사슴들.

▲ 게오르기 대공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전해진 날, 궁전에 유해 안치소를 설치하는 모습.

6월 28일 이후 궁전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6월 30일부터 추모를 위해 궁전으로의 입장이 허락되었다.

▲ 7월 6일, 게오르기 대공이 사망한 지 9일째 되던 날에 정교회 사제와 수도사들이 시신 운구에 앞서 장례식이 열리는 아바스투마니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Church of St. Alexander Nevsky)로 입장하고 있다.

▲ 아바스투만 궁전에 안치되었던 게오르기 대공의 관이 정교회 사제들의 뒤를 따라오는 모습. 황금들것에 실린 도금된 관은 황위 계승자의 깃발로 덮여있었다.

▲ 게오르기 대공의 관이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로 입장하기 직전의 모습. 관은 황실 일족들과 귀족들, 러시아 제국의 장군, 주치의가 운구하였다.

▲ 제복을 갖춰 입은 장교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모습.

▲ 장례식이 열리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 앞에 선 의장대와 지역주민들.

▲ 게오르기 대공의 사망을 애도하는 기간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교회와 현재의 모습. 이곳에는 그의 심장이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태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러시아 황실, 특히 모친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a Feodorovna, 1847~1928)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린 시절만 해도 황실 아이들 중에 가장 건강했던 게오르기 대공은 영리하고 유머러스해서 가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형 니콜라이 2세는 동생이 자신을 웃겼던 농담을 적은 종이를 훗날 이따금 꺼내보기도 할 정도였다.

▲ 게오르기 대공과 니콜라이 2세

게오르기 대공의 관은 기차와 전함에 실려 7월 11일 모스크바를 거쳐 7월 12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다음, 7월 14일 로마노프가의 무덤이 있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Peter and Paul Cathedral)에서 안치식과 함께 부친 알렉산드르 3세의 곁에 묻혔다.

▲ 러시아 본토로 운구되는 모습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 안치된 모습

이후에는 거리의 가스램프조차도 검은색 리본으로 장식되었고, 모든 러시아 대사관에는 애도가 선언되었다. 그는 황태제 신분이었기에 애도기간은 1년간이나 지속되었다.

▲ 게오르기 대공이 사망한 장소에서 추도식을 갖는 아바스투마니 주민들.

▲ 게오르기 대공이 사망한 장소 근처에 세워진 예배당에 몰려든 추모객들.

▲ 게오르기 대공이 사망한 현장에 세워진 예배당을 지키는 경비병. 오늘날 이 예배당은 소실되었지만 사망한 장소는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 게오르기 대공이 사망한 장소의 현재모습

게오르기 대공의 죽음은 당시만 해도 비극으로 여겨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4명 중 유일하게 황실의 예우를 갖춘 장례와 애도식이 거행된 인물이 되었다.

▲ 황폐화된 게오르기 대공의 궁전

훗날 러시아 혁명 당시 살해된 로마노프 일가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되었을 때 과학자들은 니콜라이 2세의 것임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1994년, 알렉산드르 3세와 게오르기 대공의 유해를 발굴하여 DNA 비교를 한 결과 100% 니콜라이 2세임을 증명해낼 수 있었다.

▲ 발굴되는 알레산드르 3세와 게오르기 대공의 묘

특히 게오르기 대공의 경우 니콜라이 2세와 마찬가지로 부계와 모계의 유전자를 모두 가진 형제였으므로 분석에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95년 전 황태제의 비극적인 죽음이 그를 평생 그리워했던 형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을 안식에 들 수 있게 도와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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