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초콜릿 제국 '조르주 보어만(Georges Bormann)' 공장 내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보만(Georgy Nikolaevich Borman)은 대학을 졸업한 후 넵스키 대로(Nevsky Avenue)에 있는 조그만 제과점에 취직했다.

유쾌하고 근면한 성격이었던 이 청년은 제과점 사장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자식이 없던 노부부는 니콜라예비치에게 가업을 넘기기까지 하였다.

제과업에서 미래를 본 니콜라예비치는 1862년, 매장의 이름을 프랑스 스타일인 '조르주 보어만(Georges Bormann, Жорж Борман)'으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보만(Georgy Nikolaevich Borman, 1837~1918)

사업은 눈부시게 빠른 성장가도를 달렸다.

187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전 러시아박람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1876년에는 제과업계 최초로 제품의 라벨에 러시아의 국장을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으며 높은 명성을 얻었다.

▲ 20세기 초, 넵스키 대로의 '조르주 보어만' 매장

이후 1878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비롯해, 19세기 후반까지 세계 각지의 전시회에서 7개의 상을 수상하면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제과업체로 우뚝 섰다.

1895년에는 아들 게오르기 그리고리예비치 보만(Georgy Grigoryevich Borman)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2대 경영이 시작되었다.

▲ 게오르기 그리고리예비치 보만(Georgy Grigoryevich Borman, 1875~1952)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공장이 추가 설립되고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도 2곳의 공장을 설립하는 등 기업은 점점 번성했다. 빠른 배달을 위해 마차를 없애고 특별운송차량을 도입하는가 하면 브랜드의 이름을 건 증기선은 바다를 누볐다.

▲ 1904년, 조르주 보어만의 운송차량

하지만 러시아 대부분의 회사와 마찬가지로 공산혁명의 도래와 함께 조르주 보어만도 1918년, 국유화라는 종말을 맞이했다.

창업자 니콜라예비치는 자신의 회사와 함께 1918년에 별세하였고, 아들 그리고리예비치는 파리로 이주해 사업 재개를 시도했으나 부활에 실패하였다. 마치 물거품처럼 20세기 초까지 '초콜릿 제국'을 건설했던 조르주 보어만은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 조르주 보어만의 제품들

아래는 러시아 제과산업을 이끌던 조르주 보어만의 크랜베리 주스를 생산하는 공장의 19세기 후반 모습을 담고 있다.

▲ 산지에서 수확한 크랜베리가 조르주 보어만 공장의 지하실에 보관되는 모습.

조르주 보어만 공장은 200가지 종류의 초콜릿과 과자를 출시했고 마시멜로, 과일주스, 막대사탕 등 연간 2400톤에 달하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현대의 생산량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19세기 후반의 수치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 배럴에 담긴 크랜베리를 압착기에 넣어 즙을 짜내는 공정.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조르주 보어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9개의 매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 크랜베리 추출물을 제조하는 기계. 조르주 보어만은 생산공정에 기계를 도입하며 제과업체의 선두로 올라설 수 있었다. 공장에는 석탄을 연료로 한 증기엔진이 가동되어 쉴 새 없이 다른 기계들을 돌렸다.

▲ 생산된 크랜베리 주스를 병에 담아 밀봉하는 공정. 당시 조르주 보어만은 향미증진제나 색소를 사용하지 않고 원료만 가공한 제품을 생산하였다.

▲ 여성노동자들이 완성된 크랜베리 주스를 규격상자에 포장하고 있다.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 국유화된 조르주 보어만의 공장들은 '제1 국립사탕초콜릿공장'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자본주의의 화려함은 접고 제품의 다양성과 부피를 감소시키며 쇠퇴했다.

▲ 조르주 보어만의 생산시설을 이어받은 업체들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변경되다가 현재는 세계 20대 제과업체인 유나이티드 컨펙셔너즈(United Confectioners)로 이어지고 있으며, 과거 확장된 공장이 있었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도 '주식회사 비스킷-초콜릿(Бисквит-Шоколад)'이 자사의 연혁에 조르주 보어만의 역사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두 업체 모두 과거의 경영주나 생산기술과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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