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일제시대 회고



해마다 8월이 오면...


나는  해마다 8.15 해방절을 맞이할 때면   조선 해방 전쟁에 참가한 유일한 고려인이며 그당시 < 레닌기치>신문사의 기자였든  정상진(그분은 유감스럽게도 금년 6월에 우리곁을 떠났다)선생은  우리 민족의 해방은인이며  참다운 벗이라는것을 느끼며  정상진 선생뿐만 아니라 만주일대에 주둔한 100만대군인   일본  관동군격멸전에 참가한 전체 쏘련군인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1945년 8월 9일에 쏘련은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다.   해방된 도시들에서는 전체 주민들이  «쏘련군 만세!»,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쏘련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바로 이 시기에 나는 조선에서 살았고 우리 지방에서 진행된 쏘련군환영군중대회에도 어른들을 따라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식민지통치하에서 일본인들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던 조선사람들의   생활의 여러 장면들이 다시한번  나의 기억에 떠 오르군 한다.


         ...내가 살던  지경촌은 쏘련태평양함대가 상육전을 전개하면서 해방한 원산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며  농사를 할만한 평야는  없는 지방이다. 사방이 자그마한 높고낮은 그러나 아주 가파르고 험하게 보이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   연광석을 채굴하는 그리 크지 않은 광산이 있었는데  주로   광산노동자들과 또 광산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생활분야에서 일본인들이 주인노릇을 했고 조선사람들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일본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해야 하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경촌에는 일본인들만 모여사는 아주 깨끗하고  훌륭한 벽돌집사택마을이 있었는데  사택마을에는 농촌에 사는 조선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현대시설들이갖추어져 있었다. 매 일본인 집들에는 전화, 수도, 전기,라디오,목욕탕 등 이 있었다.   마을에 있는 넓다란 광장에는  무대가  있었고 때때로 먼곳에서 어떤 때는 일본에서 온 일본인배우들이  이곳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을 위하여 공연하였으며  한달에 거의 한번씩은 예술영화를  상영했다.  일본인관람자들을 위한 자리에는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맨 땅바닥에 자기가 가지고 온 신문지를 깔고 앉아 관람하였다. 보통날에는 이 광장에서 일본인, 조선인 어린이들이 서로 어울려 아무런 민족차별을 모르고 서로 소리치며 유쾌하게 놀고 있기때문에 여기는 생활이 들끓는 아주 명낭한 광산마을처럼 보인다.

일본인 사택지점을 벗어나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 그리고  지경촌 마을을 지나 송화 온천으로 가는  신작로 양쪽에는  일본인 사택에 비하면 아주 허술한 단층초가집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생필품을 파는 여러 상점들이 있었고 국수집, 술집, 이발소 등이 있었다.   매 집은 아니였지만 어떤 집들에는  전기가 있었고 밤이면 집안은 물론 거리도  환했다.   


일본인들은 이 연광석채굴광산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잘 얼리면서 일을 시키는것이 아니라 심한 민족차별을 하면서  노예처럼 혹독하게 부려먹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허리를 펼새 없이 일해야 하였다.

여기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사는 바로 옆에 있는 산막몰이나 최촌이나 정촌 혹은 벌농막 같은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사이에서   볼수 있는 화목한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다른  세상이다.   노동자들은 늘 일본인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또 매를 맞으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며   문자 그대로 인간이 아닌 말하는 짐승들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일본인들밑에서 일하는 광산노동자들의 일을 검열하는 십장들은 조선사람들이였는데 그들은 사실상 일본인들보다 더 악독하게 조선인 노동자들을 취급했다. 때문에 노동자들을 그들을 더 무서워했고 그들앞에서도 허리를 굽신거렸다.

조선인십장들이 생트집을 잡고 조선인노동자들을 두두려패면 팰수록  일본인들은 만족한 감을 느끼며 조선인십장들에게  상금을 더 많이 올려주었고  아주 귀한 설탕, 비스켓트, 송풍과자,말눈깔사탕 , 고급담배 ,빨래비누 ,향수 냄새가 나는 화장비누 등을 특별배급으로 주었다.  광산노동자들은  일본인들보다 조선인  십장들을  더 무서워했다.  산막몰, 최촌, 정촌 등에 사는 예수교 신자들인  젊은이들도 몇명이 이 연광산에서  막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예수교신자인   최한국이는 이 연채굴광산에서 일하는 질통꾼이였다. 노동자들이 갱도 깊이 들어가  곡괭이로 연광석을  파내면  최한국이는 그것을 질통에  걸머지고 밖으로 나와 쏟는것이 그가 이 연광석채굴광산에서 하는 일이였다.  하루종일 연광석을 등에 지고 나르면 몹시 피로했다. 그런데 질통꾼인 그는 점심시간을 2시간 앞두고 밥을 먹었고    또 점심식사후 2시간이 지나면  곁두 리를  또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자기가 자기 발을 옮겨놓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점심밥이란 깡보리밥이며 여름철에는 풋고추와 고추장이였고 겨울철에는 깡조밥에 총각  김치뿐이였다. 힘겨운 육체노동을 하는 그는  하루에 두번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배급을 받는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타는 배급은 조선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는데  대한 불평을 많이 했다.

<배급량을 좀 올려 달라고 말하겠다>고 하면서 그는 일본인 십장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뿐이였고 또 그가 말한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는것도 아니였다...

그날도 그는 땅굴속으로 깊이 들어가 질통을 내려놓고 잠간동안 쉬면서 곡괭이로 연광석을 파는 노동자들 앞에서

- 이 전쟁에서 어서 일본놈들이 다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 – 라고 하면서 이 연광산에서 주인노릇을 하며 조선사람들에게는 쌀배급을 아주 적게 주는 일본인들을 미워하는 말을 했다.    그 때는 대동아전쟁말기였고   일본은 패망의 패망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어서

-빨리 일본이 패망하고 왜놈들이 없는 좋은 세월이 와서  잡곡밥이라도 고추에 된장을 찍어 하루에 두번이상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 라고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앞에서  공개적으로 거의 매일 여러번 말하군 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상황으로 보아 일본은 꼭 패망하게 되며 미국에게 먹히우게 된다는데 대하여서도  땅굴 깊은곳에서 같이 일하는 여러 노동자들앞에서 계속 말했다.


...그 이느  날 아침  질통꾼 최한국이가  직장에 도착했을 때 늘 아침마다 서로 만나면 인사를 반갑게 하던 일본인 요시다감독은 아주 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이새끼야, 왜 태도가 건방진 거야 ? 나마이끼다조, 바가야로우!(일본어)  – 하고 눈을 부릅뜨고 아무런 이유없이  자기 앞에 서있는 한국이의 귀통을 첬다.  그런데 그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조선인십장은 일본인 요시다감독을 대신하여  더 혹독하게 한국이의 귀통을 사정없이 여러번 첬을 뿐만아니라 발길로 차기도 했다. 이 때 한국이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 나릿님, 아무런 이유없이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으면 일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서서 얻어맞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참다 못해 조선인십장놈의 상통을 주먹으로    힘있게 들이첬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일본인 감독놈도 주먹으로 첬다. 질통꾼의 강한 주먹에 얻어맞은 두놈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나가 자빠졌다.  이것은 큰 사건이였다.

광산옆에 있는 경찰서에서 그 즉시로 검은 순사복을 입고 긴 칼을 찬 경찰관 두명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 한국이를 체포하여 두손을 묶고 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때 일본인경찰서장이 말했다:

-넌 일본이 전쟁에서 망하는것을 노골적으로 원하는 우리 일본의 적이란 말이다. 너같은 놈은 병신으로 만들든가 , 없애버려야 한단 말이다.  – 라고 말하면서 최한국의 귀통을 계속 첬다. 경찰서장은 계속하여

- 넌 매일 광산에서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앞에서  일본인들을 욕했고 증오했고 일본인들을 죽이려는 계획도 짜지 않았던가 ?  -라고 소리치면서 최한국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의 귀통을 사정없이 계속 쳤다.

- 난 일본인을 죽이자는 말을 안했수다.

-거짓말을 왜 하는거야 , 우린 다 알고 있단 말이다.

  이 때 옆에 있던 조선인 경찰관은 일본인 경찰서장앞에서

-일본에  충성심없는 너같은  놈을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데는  주먹이 제일이야 , 알았어 !- 하고 조선인 경찰관이 이미 곁에 준비되어 있는 고추가루 물통에서 잔에 그  물을 떠서 한국이 얼굴에 콱 뿌렸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계속 주먹으로 첬다. 이 때 한국이는 얼굴을 그에게로 돌리며  

- 야 ,이새끼야 , 넌  충성심 많은 일본놈의 개다. 그래 넌 황국신민이 다 됐는 가 – 하고  물었다.

-무슨 개나발이야, 일본인의 명령을 무조건 집행해야,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질통을 질수 있단말이다. 반항하면 할수록 네겐 손해야 . 알았어,  이 바보야,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본사람들의 말을 잘들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 라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이를 계속 사정없이 때리고 또 때렸다...

다음 날 일본인 경찰서장은    한국이를  유치장에서 석방하면서

- 네놈은  천왕페하에 대한  충성심이 없는 질통꾼이다.  구비(철직)다. 일본에 대한 불평을 말한 죄는 이번은 이것으로 끝내지만 다음번에는 용서하지 않는다 – 라고 말한 후 광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광산에서 쫓겨나 그 날부터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일본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일본인감독에게 빌어라, 그러면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질통꾼으로 다시 일할 수 있지 않느냐 – 하고 곁에 있는 노동자들이 많이 충고했지만 한국이는  

- 매를 맞으면서 왜놈들에게 충성을  하라구 ? 난 그런 일은 못해 ! 노동판이 여기뿐인가  –하고 거절했다.

- 너같은 질통꾼은  자존심이 소용없단 말이다.  질통을 지면서 자기 먹을것이나 버는것이 상책이 아닌가.  먹고살려면 잘못했다고 빌어야  한단 말이다 - 라고 모두가 충고했다.   


그와 말하는  노동자들은 땅굴속에 깊이 들어가 연광석을곡괭이로 파는  여러해 동안 같이 일하는 잘 아는 사람들이였다. 자기처럼 생각하고 그들앞에서 한국이는 일본에 대한 불평을 많이 했는데 말한 내용이  전부 일본감독에게만 아니라 경찰서에까지 반영되었다는것을  그때야 확인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땅굴속 깊은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그중에는 마음이 몹시 차거운  인정없는  사람들도 있었다는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물론 모두가 다 이구 동성으로 한국이의 불만을 일본인십장에게 전한 것은 아니였겠지만 그중에는 일본인십장의 앞잡이가 되어 설탕,비스켓트, 고급담배, 사탕 등을 배급받기 위하여  한국이뿐만 아니라 모 든  노동자들이 말하는것을  늘 일본인들에게 보고한다는것은 틀림없었다. 배급제도는 노동자들을 관리하는데 아주 좋은 수단이였다. 노동자들중에는 배급을 좀 더 많이 타기 위해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밀고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밀고가 일본인들에게 도움이 크면 클수록  밀고한 사람은  설탕, 송풍과자, 빨래비누,고급담배를 비롯한 기타 여러 물건들을 많이 특별배급으로 받게  되는것이다.     


일본인 감독이 생트집을 잡고 한국이를 때린 것이 결국 우연한 사실이 아니며 늘 일본에 대한 불평을 많이 했다는것이 아마 그를 때리게 된 기본 원인이였을 것이다.  최한국이는 광산노동자들과는 특별한 이별의 말도 없이  맥없이 광산 문을 나와 터벅터벅 자기 집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지경촌 광산촌에서 비록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이였지만  지금 그는   그들에 대한 몹시 차거운 감을 느꼈다. 


그런데 며칠이 안되어  갑자기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100만대군인 관동군이 멸망하고 쏘련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이 터지게 되자 일본제국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었고 제2차세계대전은 끝났다.          

연채굴광산이 있는 지경촌에서는 갑자기  세상이 뒤집혀 행정기관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지도적 직위를 차지하고 일하던 일본인들이 싹 물러가고  인민정권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모두 허술한 옷을 입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로건설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임시로 조직된 인민정권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서 그 어느날  최한국이가  도로건설작업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하는   일본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저쪽에서 일하든 일본인 한사람이 막 뛰어 그의 앞에 나타나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땅에 머리를 대고

-나릿님 , 제발 잘못했수다. 죽을 죄로 잘못했소.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두손으로 빌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이를  광산에서 때려 내쫓은 요시다 감독이였다. 

일하던 일본인들은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고 모두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요시다 감독놈을 바로 이 자리에서 목을 매여 죽여버리자 – 라고 이 때 한국이와 같이 온 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왁  밀려가서 미리 준비한 바줄을 그의 목에 메고 개처럼 막 끌고 길옆에 있는 소나무곁으로 갔다.   일본인들은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하다가는 자기는 물론 자기 가족까지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였다.  다만 멍청하니 서있던 최한국이만이 그곳으로 뛰여가  적극 말렸고 몽땅 중지시켰다. 기독교신자인  최한국이는  요시다 감독에게 말했다.

- 그 때는  문제가 달랐지만, 지금 일본정권이 없어졌고  무법천지인 이 상황에서 당신은 절대로  원쑤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당신을 동정합니다.나는 당신이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모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하도록 우리는 당신들을 도울것입니다 - 라고 말했다.   


얼마후에 쏘련군이 지경촌에 나타났고 진정한 인민정권이 수립되자 차츰  법적 질서가 유지되기 시작했다. 우리 고향부근에 주둔했던 일본군인들은 몽땅 쏘련군에 포로되어 씨베리야를 비롯한 쏘련의 여러 포로수용소로 끌려갔고 3년이상 강제노동을 했다. 그중 많은 관동군의 젊은 장병들이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쏘련 땅에서 죽었다.  100만대군인 일본 관동군을 격멸하고  일본식민지통치에서 조선민족을 해방시킨  위대한 쏘련 군에 대한 고마움을 나는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김종훈




인터넷에서 우연히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원로가 기고한 위의 일제시대 관련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알려져 있듯, 카자흐스탄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10만여명의 고려인이 버려진 곳입니다.


위 글의 작성자인 김종훈은 <허진, 최국인, 한진, 이경진, 이진환, 정인구, 최선옥, 양원식, 정추>등과 함께 소련에서 공연예술과 영화를 전공한 유학생 모임의 일원으로 이들은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와 음악대학에서 유학한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북한정권의 수립을 지지한 사람들이지만 1957년 '김일성의 1인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명령이 떨어졌고 1958년 '반(反) 김일성 선언'을 하고 망명한 '10인회'입니다.

이들 중 몇몇은 북한에서 연해주로 러시아로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본공민, 북한공민, 소련공민, 무국적 공민으로 고단스런 삶을 살아가야 했으며 현재는 10인중 김종훈(87)과 최국인(87)만이 카자흐스탄에서 생존해 있습니다.



10인 중 한 사람인 정추는 러시아 음악의 대가 차이코프스키 음악 계보를 잇는 유일한 제자인 작곡가 타네예프의 제자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차이코프스키 4대 제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차이콥스키 음대 졸업 작품인 《내 조국》으로 유례없이 심사위원 만점을 받을 정도로 음악성을 인정받은 사람이며 1961년 유리 가가린의 첫 우주선 발사현장에서 그의 곡이 연주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곡은 현재 카자흐스탄 음악교과서에 무려 60곡, 피아노 교과서에는 20여 곡이 실려있을 정도이며 대한민국으로부터 KBS재외동포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기도 하였으나 지난 6월 13일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관련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562595



글 서두에 언급된 정상진은 1945년 '정 유리 다닐로비치(정률)'라는 이름의 소련군 장교로 청진상륙작전을 펼쳐 북한에 진주해 있다가 광복을 맞았고 소련군의 지시로 원산항에서 김일성의 귀국 행사를 벌이는 등 북한 정권 수립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북한에서 차관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다른 소련파들과 함께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북한을 떠나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으로 북한정권을 지지했던 사람이지만 최근 인터뷰에서 한 말을 보면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소련군이 공언한 대로 조선이 자유로운 나라가 될 줄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소련 점령군의 정책은 조선 인민들에게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소련은 반인민적 ‘붉은 식민지’ 정책으로 일본 식민 통치자들보다 더 무서운 참극을 전체 한반도 인민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원로로 존경받다가 지난 6월 16일 9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관련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5209700


한때는 대한민국과 대치점을 이루던 사람들이기도 하고, 글 내용중 '위대한 쏘련 군' 등의 표현때문에 이질감도 느껴지지만 일제시대 말기의 분위기와 한국인들의 처지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글이라 관련인들의 정보와 함께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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