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화재로 소실된 단성사(團成社)

- 극장 단성사(團成社) 소실(燒失)
- 1915년 2월 18일 새벽 3시

- 뼈만 남은 단성사

 

지난 18일 새벽 3시경 음담한 일기에 바람은 잔잔히 불똥 말똥 하고 만뢰는 구적하여 각처에 닭의 소리만 요란히 들리고, 그렇게 초저녁부터 칠팔백 명의 관객이 터지게 드러 앉아 둥당거리고 여러 가무 재예를 흥행하던 동구 안 단성사 연회장이 적막하기 한량없을 때.

 

이때 단잠도 이루지 못하고 높은 망대 위에 앉아 사방으로 눈을 두루며 혹시 불 염려는 없나 하고 마음이 항상 편치 못한 창덕궁 소방대 소방수는 폭폭 졸린 잠을 차마 자지 못하고 경성시 내외를 부감하여 살피던 중, 별안간 동구 안 파조교 근처로부터 화광이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므로 깜짝 놀라 각처 소방대로 전화를 걸고 방향을 찾았으나 모두 한결같이 어느 쪽인지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데 대체로 깊은 밤의 불이라는 것은 매양(항상) 가깝고도 멀리 보이는 법이라.

▲ 1914년 1월 17일, 외부공사를 마친 단성사의 모습


그때 연회장 안에서는 누워 자고 있던 배우 네 명 중 이창호가 불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 다른 배우들을 깨워서 유리창을 깨뜨리고 뛰어나왔으며, 창덕궁 소방대에서는 급히 출동하여 수관차(水管車)를 끌고 나팔을 불며 경종 소리를 따라 파조교 근처에 당도하였다.

▲ 당시의 수관차. 완용 펌프(좌), 가솔린 펌프(우)


뜻하지 않게 단성사 연희장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하늘을 찌를 듯 무럭무럭 일어나고 불길이 점점 맹렬해짐을 본 파출소에서도 즉시 북부경찰서에 보고하여 다수 서원(직원)이 급히 출장하였다. 또한 황금정 소방대와 동대문 소방대, 기타 남대문 소방대 각처가 모여들어 그 근처 소화전을 열고 일제히 무자위를 들이대어 진화하였지만 불은 이미 그 안에서부터 모조리 태우고는 필경에는 가득한 연기와 팽창한 불길은 통할 길이 바이없다가 바깥까지 범하여 쉴 새 없이 연소함으로 일이 이미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용맹한 소방수들은 일변(한편) 그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불이 무대까지 범하려 하는 것을 극력 소방한 결과로 다행히 전소는 안되었으나 그 모양을 보면 전소나 다를 것이 없이 네 벽의 뼈대만 남았고, 한동안 그 근처에는 강을 이루어 대소동이 되는 동시에 연희장 집 지은 후로는 이번이 처음 불이므로 한참 동안 일장 대혼잡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며 손해는 목하 조사 중이라고 한다.

▲ 내부는 전소되고 뼈대만 남은 단성사


불의 원인은 단성사 상등석 옆방에서 차 파는 자가 연극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화로에 불을 즉시 끄지 않고 무심코 문을 잠그고 간 까닭으로, 불은 은연히 화로를 다 태우고 필경에는 바닥 다다미까지 연소시키고 거침없이 사방 주위와 천장까지 모조리 태운 후에 불길이 바깥으로 뛰어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 단성사 변천 모습. 1937년, 1955년, 1995년, 2005년


이 단성사 연희장은 경성에 딱 한 곳 있는 새 연극장으로 그 전 단성사를 헐어버린 후 새로 건축하기까지 반년 이상의 세월을 허비하고 일만 원 이상의 건축비를 들여 작년 1월에 비로소 공사를 마치고 작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1914년 1월 27일) 비로소 무대를 열었으나,

그 후 전황(전쟁이 발발)한 까닭으로 집이 많이 비어 당초에 남의 빚으로 집을 지었다가 비상한 곤란을 당하여 문서를 이리저리 옮겨 잡힌다 어찌한다 여러 풍파를 겪다가 음력 작년 섣달(1915년 2월 13일)에야 지금 흥행하는 구 연희(구 연극) 일행에게 빌려준지 며칠이 못되어 이런 불의의 재앙을 당하였다 하며 거기서 흥행하던 구 연희 김재종 일행은 당분간 동구 안 장안사에서 계속하여 흥행한다더라.

【매일신보 1915.02.19】

- 만뢰구적(萬籟俱寂): 밤이 깊어 아무 소리 없이 아주 고요해지다.
- 둥당거리다: 북, 장구, 가야금 따위를 두드리거나 타는 소리를 잇따라 내다
- 한량없다(限量없다): 끝이나 한이 없다.
- 부감(俯瞰): 높은 곳에서 내려다봄
- 무자위: 물을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기계
- 바이없다: 어찌할 도리나 방법이 전혀 없다.

 

■ 단성사 옆 파조교의 현재 위치

본문에 나오는 파조교(罷朝橋)는 '파조교 6·10 독립만세 선창지'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 단성사 과거와 현재사진으로 본 파조교 위치

파조교 위치는 위의 빨간 원 부근으로 두 사진을 비교해 회동천 제방의 모습과 파조교가 있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지금은 매립되어 당시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2010년 회동천 제방이 발굴 복개되고 2016년 종묘전교까지 복원되면서 원래 제방의 모습과 파조교와 비슷한 형태였을 교각도 볼 수 있게 되었다.

 

▲ 회동천 제방 발굴 상황과 복원된 종묘전교

 

■ 단성사 실화범은 누구인가?

- 단성사 주인의 「부친」 실화죄로 재판소에

 

경성부 수은동 56번지에 사는 안성범(65)은 1915년 2월 17일 하오 8시에 단성사 연극장 이층 한편 옆에 방석, 화로, 차, 과자 등속(等屬)을 벌여두고 일반 구경꾼에게 공급하던 터인데, 17일 밤 11시가 넘어 연극이 파한 후 문을 잠글 때에 그 안성범의 매점에 불있는 화로를 들여놓을 때에 충분히 끄지 않고 심상히 들여놓은 후 돌아갔는데,

그 불은 은연중 점점 일어나 마침내 불똥이 다다미에 붙으며 연소되어 2월 18일 새벽 네시 반까지 그 집 건물이 대부분 소실되어 손해가 이천 원에 이르렀으므로 경성지방법원 노다(野田) 검사가 심리한 후 실화죄로 기소되어 지난 16일 공판을 열었다더라.

【매일신보 1915.03.17】

 

화재당시 기사에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단성사 화재는 매점 운영자의 부주의가 원인이었으나, 이후 추가 보도에 따르면 그 사람은 단성사 사장의 부친으로 밝혀졌다.

일제시대 당시에도 실화죄는 기소되어 처벌받았으며, 현재와 같이 화재보험도 존재했으나 빚까지 내어 건설을 막 끝낸 참이라 거액의 보험을 들었을지는 의문. 부친의 실화라 민사소송을 걸기도 힘들었을 듯하다.

알려진 단성사 역대 사장명단에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은 없으나 기록으로 남지 않은 인수자도 많았다고 하니 그중의 한 사람의 부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현재의 단성사(2020년 6월)

현재 단성사는 단성 골드 빌딩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예전과 같은 영광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바로 옆에 종로 119와 종로3가 치안센터가 있어 100여 년 전과 같은 화재피해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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