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의 진상: 탈출한 16세 홍위병간부 폭로수기 ②

- 모택동 사상은 한 방편
- 오적(五赤), 오흑(五黑) 계급출신 맞서
- 얌전한 학생들 선동받고 난동
- 너무나 지독했던 고문, 살인
- 공작대원이 고문 선동

고문을 하도록 선동한 것은 공작대의 요원들이었으나 그들은 교내의 무뢰한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무뢰한들은 5개의 붉은 계급(오적: 노동자들, 빈농 또는 중하층 농민들, 당의 기간요원들, 인민해방군, 그리고 혁명영웅들과 그들의 자녀들)에 속해있었다.

그들의 거의다 북부지방 출신이었고 거칠고 잔인하고 학교 성적도 나빴다. 그들이 교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아마 이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맨 처음에는 무뢰한들은 5~6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때까지도 약간은 교사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일부 학생들은 아직껏 사람을 때려본 일이 없었는지도 모르며 얼마 동안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뒤에 남은 공작대 선동자들이 부채질을 시작, 학생들을 여러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호남성의 농민운동'에 관한 모택동의 보고서(주: 1927년 3월 모택동이 다가올 혁명에서 농민들이 담당할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농민들의 지주층에 대한 폭력과 테러의 사용을 정당화한 문서)를 연구하게 하고 폭력에 의한 운동을 훌륭한 것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적절한 분위기뿐이었으며 공작대는 이것을 만들어냈다. 학생들은 크게 대담해져 "놈들을 쳐라!"하고 소리치고 교사들에게 뛰어들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했다. 뒤에 흩어져있는 학생들은 고함을 지르고 불끈 쥔 주먹들을 흔들어 그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같은 사태는 별로 이상스러울 것이 없었다. 젊은 학생들은 본래 평화적이고 품행이 단정하지만 평소에도 교사들을 때리기조차 하는 자들이 한번 첫발을 내디디면 다른 학생들은 뒤따라야 했다.

《한 학생이 채찍을 휘두르며 그의 선생을 고문하고 있다. 선생이 쓴 고깔에는 수정주의자 교장 앞잡이 '황덕전(黃德全)'이라 쓰여있다. 이 그림은 홍위병시절 수기의 주인공이 그린 것이다》



● 수많은 교사들 자살도

6월 12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어 나는 천천히 가해지는 신체적 고문이 원자탄에 의한 대량 살해보다도 훨씬 잔인한, 아니 수천 배나 더 잔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여러 가지 악몽, 몸서리 끼치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놀랄까 두려워 가족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것이 사람을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방법이란 말이냐. 닭은 칼로 한번 찔러서 죽일 수 있지만 고문을 받았다고 해서 사람은 빨리 죽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내가 교사라면 나는 틀림없이 자살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부양할 가족들이 없는 많은 교사들이 그 후 자살했다. 죽기 전 그들은 침착해졌다. 자살하기 전 한 교사는 이렇게 적어놨다.

 

"나는 너희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의 교편생활이 이렇게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희들도 언젠가는 나의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 전쟁과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는가를 생각했다.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만일 누군가가 내가 죽어주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수월하게 죽을 수만 있다면 나는 자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까닭은 사람이 아무리 입신출세한다 치더라도 종국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려고 싸우는 것일까. 왜 불쾌한 것들을 목격하려고 싸우는 것일까.

《홍위병들이 구적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오래된 무덤을 파헤치고 비석을 부수고 있다.》



● 공산주의엔 "살인 필요"

나는 생각했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을 따르는 공산주의 사회의 잘못이 무엇인가 하고.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목표를 성취하는 첫 단계로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비살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이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는 이런 생각들을 감히 입밖에 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용기를 내어 학교에 간 나는 더 많은 고문 광경을 보았다. 나는 심한 충격에 넋을 잃었고 냉정을 되찾으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엔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있다'라고 자신을 달랬다. 약 10일이 경과하니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피 묻은 몸을 보거나 비명소리를 들어도 불안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내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친숙하게 지내던 양신영 선생이 심한 매를 맞아 숨진 사건이었다.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는 것은 반동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그 무뢰한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몇 번인가 나는 그를 구하려 해 보았으나 헛일이었다. 심지어는 그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내 면목을 좀 세워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보복하겠소"라고 글을 써 보내기도 했다.

양선생의 유서에는 '나는 성실한 중국인이다. 나는 성실하게 죽는다.'라고 적혀있었다. 노령에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양선생은 오전 11시 30분 집에서 끌려나가 두 시간이 넘도록 여름 햇볕 아래 세워졌다가 플래카드를 들고 징을 치는 군중들에게 거리로 끌려다녔다.

그는 한 건물의 4층까지 끌려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심한 매를 맞았다. 예순이 넘은 노인을 상상해보라. 그는 몇 번 의식을 잃었다가 그때마다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져 깨어나곤 했다. 그는 거의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그의 두발은 유리조각과 가시로 상처투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패기는 꺾이지 않았다. "왜 죽이지 않느냐. 나를 죽여달라."고 그는 소리쳤다.

이같은 고문이 6시간 동안 계속된 후 그는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 그들은 그를 운동장으로 끌고 가 다시 그의 몸에 찬물을 퍼부었다. 살인자들 자신도 잠시 동안 움찔했다. 그들도 아마 사람을 때려서 죽인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들도 대부분 이런 광경을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고, 살인자들은 다소 겁을 먹었다.

《학생들이 그들 선생들의 머리를 깎은다음 벌레를 억지로 먹이고 있다. 이 그림 역시 수기의 주인공이 그린 것으로 선생들은 그들 죄상이 적힌 플래카드와 함께 벌레통을 쥐고 있다.》



● 사인엔 '고문' 못 넣게

그들은 학교 담당의사를 불러 "그가 고혈압으로 죽었는지 여부를 잘 검시하시오. 그를 옹호해서는 안되오"라고 말했다. 그 의사는 양선생이 고문 때문에 죽었다고 선언했다. 무뢰한들은 의사를 붙잡아 두들겼다. 결국 그 의사는 사망진단서에 '고혈압에 의한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사망했음'이라고 사인을 적어 넣었다.

현장에 달려간 양선생 부인은 시체 인수를 허락받기 전에 이 진단서를 확인해야 했다. 문화혁명 기간중 갑자기 자연사한 것으로 공식 확인된 많은 '인민의 스승들'과 그 후 홍위대가 병사, 또는 실종했다고 발표한 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사실은 고문으로 숨졌다는 것을 많은 국외자들은 몰랐다.

공작대의 대부분이 철수한 지 며칠 안되어 아는 공작대로부터 호의를 얻지 못했던 학생회와 공산청년동맹의 전회원 약 70%와 더불어 공작대 반대운동을 벌였다. 나는 전적으로 공작대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이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훨씬 훗날 우리가 승리한 것은 공작대원들이 유소기(류사오치)의 지지자로 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는 모택동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승리한 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당시의 대세를 따랐을 뿐이다. "우리는 단호한 투쟁에서 모(毛)의 사상을 십분 사용했다." 이렇게 말하여 우리는 당으로부터 보다 많은 호의를 얻게 됐다.)


며칠 안 가서 우리는 학급의 주도권을 잡았다. 먼저 다른 학생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구학생회의 위신을 이용했던 것이다. 수적으로 우리는 우세한 입장에 있었다. 공작대는 항상 학생들에게 거만하고 모욕을 주어왔기 때문에 공작대에 대한 반감이 널리 퍼져있었다. 나 또한 나의 급우들과의 친분관계를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학생회의 부회장으로 있던 때 나는 결코 나의 책임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며 늘 조정역을 맡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학급에서 '반공작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부모를 보호하고 공작대를 축출하자!"는 구호를 이용, 이미 자기네 부모들이 학교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오른 학생들과 한편이 됐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많은 추종자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Reference:
- 동아일보. 홍위병의 진상 ② (1970.01.22)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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