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의 진상: 탈출한 16세 홍위병간부 폭로수기 ③

- 수색 핑계 약탈
- 아편 뒤지는 척 황금에 혈안
- 혹독한 고문 못 이겨 투신
- 가족에게 자살 가장 압력
- 혁명위 인기 잃고 실권

통솔력을 확립하는 데 있어 나는 처음에는 학생회의 기능을 일단 정지시키고 학생회의 간부들이 학급활동에 있어 학생들과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요컨대 나는 앞으로 학생회가 독자적인 권능을 발휘하지 말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많은 학생들을 납득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이제 와서 과거의 동료들이 간부들을 능가하기를 바랐겠는가. 다른 한 편, 혁명준비위원회는 한결같이 완고하고 거만한 태도를 지녀 대다수의 학생들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

학생들 역시 위원회의 지시를 수행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로 미적거리거나 위원회를 대담하게 무시하기도 했다. 위원회는 점점 인기를 잃게 됐고 실권 없는 집단이 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집중시키려는 의도를 성공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설사 올바르지 않더라도 많은 유력자들을 '반동적 학교 당국자들'과 '짐승이나 다름없는 악마들'이라고 지목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다. 나는 학교의 교직원 총 17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교장은 나의 은사였다. 그는 이민 타도됐으므로 그를 지목하는 것은 하등 소용없는 짓이었다.

패충화 교감은 장정에 참가했던 구시대의 간부였으나 부패 인물이었다. 나는 부패한 사람과 깡패를 증오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경멸당하고 있다. 내가 지목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나는 오적색계급의 구성원으로서 새로운 권세를 남용했던 '변절'된 농민 노동자 출신 인물들을 지목했다. 나는 이런 불량배들 때문에 상당한 재산과 직업 및 토지를 잃은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등 나의 가족의 원한을 풀기 위해 이들을 지목한 것이었다. 모두 해서 나는 20명 이상을 지목했다.

《1967년 북경의 겨울거리. 운집한 홍위병들의 조소를 받으며 반동으로 몰린 자본가계층의 시민들이 트럭에 실려 끌려가고 있다》



● '오적'생들 학급서 축출

나는 내가 존경하던 교사들이나 오흑색계급(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악성 분자, 우익분자 및 이들의 자녀)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지명을 피했다. 나는 우리가 그들과 꼭 같은 운명을 겪었기 때문에 그들을 동정했다. 그 결과 나는 이를 '고의적인 계급 보복'이라고 지적한 '오적'출신의 급우들로부터의 강한 반대에 직면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급우들은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질 수밖에 없었다.(오흑계급출신의 학생들이 압도적인 다수였다는 점이 우리 학교의 예외적인 특징이었다.) 우리는 회의를 통해 배신이란 딱지를 붙여 이들 '오적'학생들을 학급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나중에 '오적'이 반이상 차지한 다른 학급에 합류했다.

《오흑색계급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목에 팻말을 걸고 삭발당한 채로 노동을 하고 있다.》



● 구적 타파로 대립 완화

이 두 학급은 전 고교생들의 과합중심지가 됐다. 한창 절정일 때 우리 학급엔 300명 이상이, 상대방 학급엔 200명 가까운 학생이 규합됐으며, 이들 가운데는 동계중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이중 어느 그룹에도 끼지 않은 학생들은 양쪽에 모두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들 그룹 간의 적대의식은 매우 심각했었다. 지도자들은 논쟁을 통해 자주 서로 공격했고, 더러는 심지어 주먹다툼까지 벌어졌다. 이들은 회합을 지원하는 일에나 선전공세에 있어서는 경쟁으로 맞섰다.

그러나 7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적대관계는 사대구적의 타파를 위한 캠페인으로 관심이 옮겨짐에 따라 크게 완화됐다.(이 캠페인은 구사상, 구문화, 구관습, 구습성을 타파하기 위한 초기 운동의 강화를 나타낸다. 사대구적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추진하는 조짐은 혁명적 청년들에게 그들의 투쟁을 사회로 전파시킬 것을 주장한 신문 사설에 나타났다.)

학급 세력은 이 두 그룹의 지도자들의 손에 집중돼 있었다.


● 한방에 60명씩 감금

우리는 공동으로 교정 위에 세워진 2층 건물의 2~3개의 방으로 만들어진 감옥인 '짐승 같은 악마의 어두운 소굴'을 설치했다. 이 소굴에는 한방에 20~30명씩 약 60명의 교사들이 투옥됐다.

우리는 간호, 심문 그리고 나중에는 가족면회시간 등 계통적인 체제를 갖추었다. '지도 집단'의 고참 상급생은 이 '어두운 소굴'로부터 '짐승 같은 악마'들을 소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후에 통합통제부가 설치되자 나와 혁명준비위의 한 위원은 8인위의 요원직을 맡게 되었다. 이 8인위는 어느 위원이든 심문권을 갖고 있었다.

만일 어떤 학급이 특정교사를 소환하기를 바란다면 제일 먼저 우리들로부터 허가를 얻어야 했다. 교사의 심문은 폭력에 의하기도 했고 폭력에 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비폭력적 방법을 취했다. 두 달 동안에 걸친 투쟁기간 동안 나는 누구든 때린 일이 별로 없었다. 나는 내가 가정교육이 훌륭한 청년이지 싸움 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철저히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글로 공격할 수 있었다.

물론 나 역시 때로는 "조져대!"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 잔혹한 투쟁의 생생한 본보기로 몇몇 교사들의 예를 보자.


● 밤낮 중노동으로 혹사

우리 물리교사는 '대지주'와 '구반동'이라는 혐의로 '어두운 소굴'에 투옥됐다. 그는 밤낮으로 중노동에 처해졌다. 그는 상당히 난청자였기 대문에 보청기가 부서지면 잘 듣지 못했다. 그의 담당자들은 그를 음흉단지며 귀머거리 인체 한다고 욕하면서 지독히 잔인하게 고문했다. 그는 이 고문을 견디어내지 못해서 어느 날 아침 담당관들이 학교 건물 3층에서 잠들게 허용하자 그는 창밖으로 투신하고 말았다.

나는 그날 아침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건물에서 잠자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교정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여서 막 잠에서 깨어나서는 바로 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바로 얼마 후 누군가가 내게 와서 우리에게 그 황교사가 자살했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뛰어나가 지상에 뻗어버린 그를 보았다. 그는 감히 진상을 얘기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실족 추락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는 상당히 출혈이 심했으나 사람들은 뻗은 채 신음하고 있는 그를 둘러싸고 서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다른 두 '흉악한 악한'들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고 가족을 불렀다. 학생들은 그의 가족들이 그에게 자살을 가장하도록 종용했다고 비난하면서 가족 중의 한 사람을 강제로 자백시켰다.

"황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그와 우리 사이에 명백한 선을 그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도발적 행동을 취한데 대해 투쟁해야 한다"고.

그 후 닷새만에 그는 죽었다.


이때가 되자 가족들은 누구에게나 "우리는 며칠 전 진술한 대로 말할 것을 강요받았다. 우리를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진상을 밝혔다.

《중앙문화혁명단은 '가난할수록 영광스럽다'는 슬로건 아래 가죽신발, 양말, 심지어 기운 곳이 없는 옷을 입는 것은 '범죄'로 간주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남녀에 관계없이 학생답지 않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불을 붙였고, 깨끗한 옷은 누더기로 만들었다.》



● 집 수색하며 파양 일쑤

물리 선생이 죽은 지 이틀 후 우리는 그 선생 집을 습격했다. 당시 '혁명적 교사 학생들'로 불리었던 우리 홍위병들은 그 선생의 라디오, 책, 은행통장까지 깡그리 빼앗아 집어넣었다.

우리들 중 몇 사람들은 아편을 수색한다는 핑계로 마당을 1m나 파는가 하면 지붕 밑 골방을 부수고 들어갔으며 집의 벽을 때려 부쉈다. 그들은 실상 아편이 아니라 금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가정에서는 보석이나 금색 도금을 한 쇠붙이 까지도 집 근처나 마당을 파고 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1966년 8월, 모든 잡귀를 청소한다는 핑계로 홍위병들은 때리고 부수고 빼앗았다. 홍위병들끼리도 약탈을 당하면 상대방의 집을 습격하는 상호 보복행위까지 더해져 90% 이상의 가정이 한차례 이상은 약탈을 당했다.》

나도 그들 가운데 끼어 특히 앞으로의 투쟁에 사용할 자료가 없나 하고 찾았다. 나는 선생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읽어보았다. 놀랍게도 이 말없는 사람은 정열적이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지주의 더러운 얼굴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혈관 하나하나가 인민의 피와 땀으로 채워진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또 그가 나의 사상적 태만에 유의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나에 대해서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이 소년은 계발할만한 놈이다. 이런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선생으로서의 하나의 기쁨일 게다. 지난 10여 년간 교육계가 점점 암담해졌고 그때마다 나는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단지 이 학생과 같은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치 않고 외면해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진실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좋은 스승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4명의 가족들이 꿇어앉아 애원하는 것도 뿌리치고 떠나기 전에 집안을 온통 약탈한 후 문을 폐쇄해버렸다.

나는 특히, 자기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 때문에 학교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던 내 나이 또래의 그 선생 아들을 보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약탈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그의 쌍안경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양심이 흐려졌던 것이다.

나중에 나는 북경의 연설회장에서 모택동을 구경하는데 그 쌍안경을 썼다.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그 쌍안경을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그때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바닷물 속에 집어던지고 출렁이는 바닷물이 나의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주기를 빌었다.(계속)


Reference:
- 동아일보. 홍위병의 진상 ③ (1970.01.24)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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