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의 진상: 탈출한 16세 홍위병간부 폭로수기 ⑤

- 약탈한 선정 소설에 미쳐
- 일부 학생 실연하길 원해
- 밥 먹다 겨뱉는 것도 낭비

우리들 몇몇 간부들은 죄수들을 직접 고문하지 않아도 됐다. 고문하라는 지시만 내리면 됐고 전적인 책임이 간부에게 있었으므로 단지 고문이 지나치지 않도록 감시는 해야 했다.

나는 지나친 고문은 되도록 억제하려고 애썼고 고문당하는 이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성(省) 교육위원 유갱왕 여인에게서 가장 많은 점수를 따려 애썼고 마침내는 전 성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전위대가 됐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내가 유 여인에 대해 약간의 반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녀가 시찰차 우리 학교에 온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몇몇 간부들과 함께 그녀와 점심을 같이 했다. 밥을 먹다 나는 밥에 겨가 섞인 것을 보고 차마 삼킬 수가 없어 그것을 골라내 버렸다. 나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던 그녀는 나를 꾸짖었고 그 후 어떤 회의석상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낭비가 이곳에선 골칫거리예요. 학생회 간부조차 낭비벽에 빠져있어요."

나는 그녀가 나를 두고 한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후로 나는 그녀를 싫어했다. 뒤에서야 알게 됐지만 내가 그녀에게 반대 투쟁을 벌이는 일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택동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투쟁은 위험천만했고 천운이 따르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었다. 만약 우리들이 목표를 잘못 골랐었더라면 즉 유여인이 모택동주의자였었더라면 우리들은 영락없이 반혁명으로 몰렸을 것이다. 우리들 홍위병은 번번이 이런 종류의 난관에 부닥치곤 했다. 지방 당간부나 군지휘관에 대한 우리들 투쟁의 승패는 그들이 모택동주의자냐 아니냐에 달려있었다.

《1967년 1월 10일, 어린 소년들이 혁명대열에 참가하기 위해 장총을 메고 훈련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일본기자가 중국 광동에서 찍은 것이다》



● 자백 많이 하면 벌 덜 줘

지금은 더욱 그렇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는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지식을 갖추기 위해 맘을 쏟았다. 투쟁은 근본에 있어 지식의 대결이라고 내가 믿었기 때문이었다.

반동분자들을 소환해서 심문을 계속하는 동안 나는 신체적인 고문만으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느꼈다. 고문을 받는 동안은 그들은 굴복할 것이지만 고문이 끝났을 때는 사실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는 좀 부드러운 방법을 쓰기로 했다.

우선 몇몇 죄수를 골라 집으로 돌려보냈다.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는 규정을 정해놓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예를 들면 자백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휴식을 많이 취할 수 있고 일도 적게 시키며 보다 나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죄수들을 자극시켰고 그들 사이에 경쟁심도 불어넣어주었다. 날마다 보다 나은 자리로 옮겨가는 죄수들이 생겨났고 이를 본 다른 죄수들도 기운을 얻었다.

《1966년 8월, 모든 종교는 제거 대상이 되었고, 샤먼(厦门) 남보타사(南普陀寺)의 승려와 구랑위(鼓浪屿) 산이탕(三一堂)교회의 목사, 가톨릭 신부 등이 샤먼공원의 나무에 묶여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 고문보다 설득으로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설득 방법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윗사람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으며 그것도 이중으로 받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면서도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유여인이 타도될 것이며 누구도 그려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었고 그녀의 보복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속이지 않았다. 자백서를 써낸 많은 죄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떤 죄수들은 집에 가서 자백서를 써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집에 다녀오게 했고 그들은 지정된 시간 안에 돌아오곤 했다.

나는 나를 이해성 있고 사려 깊은 젊은이니 똑똑한 젊은이니 하고 칭찬해주는 편지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런 칭찬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 들뜬 시기에 부푼 야망

나는 어떤 상황에도 자신이 대처할 수 있고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자립, 자제를 모토로 삼았다. 나는 치기를 떨쳐버리고 야망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매일 밤 코트 차림으로 사무실에 앉아 때로는 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나는 내가 마치 무슨 지도자나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히틀러나 모택동, 스탈린, 장개석과 같은 세계적인 인물들의 전기에 특히 관심을 쏟았다. 나는 몇 상자에 달하는 많은 책을 갖고 있었다. 그 책들은 내가 반동분자의 서재들 수색하면서 거둬들인 것이었으며 그중 많은 수가 당에 의해 반동으로 낙인찍힌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내 급우들은 선정적인 소설에 미쳐있었다. 그들은 전에는 그런 것들을 읽어 본일이 없었으므로 집착이 대단했고 밤마다 그런 책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심지어 어떤 급우는 그가 읽은 것을 그대로 실천해보기를 원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자제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무정부 상태 속에서는 사람이 삐뚤어지기란 대단히 쉬운 일이었으므로 나의 이런 노력은 실로 벅차고 어려운 과업의 하나였다.

학생들 대부분은 "인생에서 청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므로 그것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라고 느꼈고 "반란의 시대지만 주어진 자유만이라고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들 생각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청춘과 야망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


Reference:
- 동아일보. 홍위병의 진상 ⑤ (1970.01.29)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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