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으로 검거된 세계최초의 범죄자



범죄현장에 남겨진 지문을 토대로 범인을 잡아내는 기법은 가장 기본적인 과학수사중 하나입니다.

현대수사는 지문의 30%. 즉 '조각지문'만 가지고도 수년전의 범인을 검거해낼 수 있을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로 지문을 이용한 범죄자 검거는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1892년 6월 19일 저녁,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 네꼬체아(Necochea)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곳에 사는 프란시스카 로하스(Francisca Rojas)라는 27세 주부의 어린 남매가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살해된 어린이들은 6살 폰시아노 카라바요(Ponciano Caraballo), 4살 펠리사 카라바요(Felisa Caraballo)였고 엄마인 로하스 역시 칼에 찔린 피투성이였습니다.



엄마이자 최초 신고자였던 로하스는 오열하며 인근 목장의 농부 라몬 벨라스케스(Ramón Velázquez)를 고발하였습니다.

로하스의 말에 따르면, 벨라스케스가 남편에게 자신의 불륜사실을 공개하고 양육권까지 잃게 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즉시 벨라스케스를 체포하고 일주일간 가혹한 심문을 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고 범행 추정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목격되었다는 알리바이까지 나타났습니다.


수사가 진척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심상치않은 소문이 흘러나왔습니다.

익명의 주민 증언에 따르면, 로하스의 불륜상대가 '아이를 포기하면 당신과 결혼할 수 있다' 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문만 가지고 남매를 잃은 피해자인 엄마를 용의자로 체포하기에는 역풍의 우려가 있었습니다.


결국,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경찰청장 기예르모 J. 누네스(Guillermo J. Nuńes)는 특별 전담팀을 파견했습니다.

파견된 에두아르도 알바레즈(Eduardo M. Álvarez)경위는 신원 증명 및 통계부서의 책임자인 후안 부체티크(Juan Vucetich)와 함께 지문기법에 정통한 전문가였습니다. 알바레즈에게 하달된 임무는 '범죄자가 남긴 지문을 찾아서 채취하라' 였습니다.

그는 살해당한 남매의 방문에서 갈색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피와 함께 굳은 엄지손가락의 지문이었습니다.


프란시스카 로하스의 열손가락 지문


본부에 도착한 그는 로하스의 지문을 종이에 찍은 뒤 신원 증명 및 통계부서의 후안 부체티크(Juan Vucetich)에게 감식을 의뢰했습니다. 부체티크는 '방문의 지문과 용의자의 지문은 일치한다' 고 결론내렸고, 로하스는 결국 자백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계획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살해한 뒤 지역주민의 공분을 끌어내 사건을 빨리 결론내기 위해 친자식들의 머리까지 잘라내는 잔인함을 보였으며, 피해자처럼 보이기위해 칼로 마구 자신의 몸을 찔렀습니다. 범행에 사용한 칼도 그녀의 증언에 따라 지붕 아래에서 발견되면서 알바레즈 경위는 벨라스케스의 석방을 지시하고 로하스를 살해혐의로 구속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범죄자를 확실하게 잡아낸 현대수사의 과학적 성과로만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지만 실은 도덕적 성과가 더 큰 사건입니다. 수사를 맡았던 알바레즈 경위가 현장을 둘러보고 누네스 경찰청장에게 보냈던 보고서에는 '모든 상황이 로하스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지문은 찾아볼 필요도 없을 정도의 완벽한 심증적 증거탓에 네꼬체아 지역 경찰들이 자백을 빨리 끌어내기 위해 용의자들에게 심각한 구타와 물고문을 자행하고 있는등 전근대적인 경찰력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체티크의 과학수사 철학은 과학은 인권을 위해 사용하여야 하며, 정의는 모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는데서 출발했습니다.


프란시스카 로하스(Francisca Rojas)는 지문이라는 증거를 통해 유죄판결을 받은 세계최초의 범죄자로 이름을 남겼고, 이 사건 역시 지문으로 해결한 최초의 살인사건 수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아르헨티나는 범죄기록에 지문을 삽입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문비교검사(DACTILOSCOPIA COMPARADA), 후안 부체티크 기념관


후안 부체티크는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지문 분류 체계를 완성시켰으며, 《지문 비교검사, 1904년》라는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그의 시스템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대부분의 스페인어권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후안 부체티크(1858~1925)


1858년, 크로아티아의 흐바르(Hvar)섬에서 드럼통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후안 부체티크는 어린시절부터 음악, 어학, 수학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1884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주한 그는 1888년, 라플라타 경찰서의 신체 계측 분야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1882년경 프랑스의 알퐁스 베르티옹이 고안한 '베르티옹 범인 식별법'. 즉 사람마다 고유한 신체 특정 부위(성격적 특성, 문신, 흉터)들을 측정하여 범죄자를 식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 계측이 무고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베르티옹 식별법(Bertillon System)

영국인 과학자인 프랜시스 갈톤이 1892년에 쓴 저서 《지문》을 심도있게 연구한 부체티크는 지문감식이 범죄자 식별에 가장 용이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였으며, 범죄자들의 지문데이터를 수집하여 분류하였습니다.

그의 범죄인 식별시스템은 점차 베르티옹 범인식별법을 대체하였고 1900년, 아르헨티나는 지문이 삽입된 여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체티크의 여권, <1911년>


사망 후 그의 업적을 기려 라플라타의 경찰학교는 '후안 부체티크 경찰학교' 로 개명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경찰박물관도 생겨났습니다. 또한, 그의 고국인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도 법의학 연구센터를 그의 본명을 딴 '이반 부체티크 센터' 로 명명하였습니다. 


후안 부체티크 경찰학교(좌), 이반 부체티크 센터(우)



한편, 국내 과학수사의 역사는 1948년 11월 4일 내무부 치안국에 설치된 '감식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5년에는 감식과의 일부 기능을 떼어낸 국과수가 별도 조직으로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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