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온라인에서 '1905년, 체벌을 하는 미국 위스콘신주의 교사'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사진이다. 과거 미국의 교육현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로 떠돌고 있는데, 사실 사진 속의 교사와 학생은 같은 나이의 동급생이다. 1905년, 미국 위스콘신주 서부에 있는 던 카운티의 메노모니 고등학교(Menomonie High School)는 졸업을 맞게 되었고, 학급의 일원인 앨버트 핸슨(Albert Hansen)이라는 학생이 '친구들의 미래'를 주제로 졸업앨범을 기획했다. 한국의 고등학교도 대략 10여 년 전부터 다양한 테마의 졸업사진이 화제가 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친구들의 미래를 상상한 앨범을 기획한 것. 과거의 낡은 사진이라는 이유로 실제와는 다르게 왜곡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앨버트 핸..
윤석중(尹石重) 시인에 관한 글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그의 작품 '집 보는 아기의 노래(맴맴)'에 대해 색다른 시각으로 분석한 글 한편을 보게 되었다. 이 동요는 오래전부터 전래되어 온 「고추 먹고 맴맴」의 후렴구를 바탕으로 앞부분을 윤석중이 작사하고 박태준(朴泰俊)의 곡으로 완성한 것인데, 그 내용이 실은 '부모의 맞외도를 내포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글은 아래와 같다. ■ 옛날에는 이런 동요가 있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어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왜 갔을까? 궁금하죠?? 우리는 어린 시절 이 동요를 부르면서 아버지가 물건 팔러 (장사하러) 가신 줄 알았다. 대다수의 우리는.. 국민학교 시절에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아버지는 장..
아래의 사진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대에 수도 한성(서울)의 거리에서 조선인 물꾼(물장수)이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 노블(William Arthur Noble, 1866~1945)이 촬영한 것이다. 이 시기는 수도가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한성부민들은 한강물을 길어다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즉 생존에 필수적인 물을 힘들게 떠다 주는 사람들은 낮은 신분의 위치에 있었으나 실제 세도만큼은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하기 위해 각 동네별로 물꾼 조합이 형성되었으며, 수요량이 많은 동네의 물꾼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곳보다 큰 값을 치러야 하기도 했다. 물 수요가 비교적 적은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창선방좌(昌善坊座)에 있던 물꾼이 도심에..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는 조선총독부의 시정(市政)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일본은 이 행사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실적을 본국에 자신만만하게 드러냈고 자국기업과 국민들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조선인들에게도 새로운 문명을 전파하는 제국의 신민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목적을 두고 있었다. ▲ 1929년, 경성 전경. ▲ 삼각산에서 내려다본 경복궁 조선박람회장. 박람회장의 전체면적은 약 10만 평, 건평은 약 1만 7천여 평에 이르렀다. ▲ 조선박람회장 입구를 지나가는 전차. 왼쪽으로 1926년에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가 보인다. 박람회 개최를 앞두고 경성전기(주)는 부지를 둘러싼 전차노선을 신설하였고, 관람객들은 새로 생긴 박람회..
현대에는 상시 열리는 시장과 대형마트 때문에 전통적인 오일장은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과거 장날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볼거리, 즐길거리가 부족한 시대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축제와 같았다. 아래의 사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5월 중순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린 오일장의 풍경을 담고 있다. ▲ 1948년 5월, 전라남도 광주지역의 번화가에서 열린 오일장에 상인과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광주 지역에는 이와 같이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오일장이 장소를 달리하여 열렸다. ▲ 대로변에 있는 전남서적주식회사(全南書籍株式會社) 제8판매소(第八販賣所)와 손님을 기다리는 직원. 입구 여기저기에는 상록수, 임꺽정(林巨正), 백범일지 등 판매 중인 도서를 찾기 쉽게 종이에 적어 붙여놓고 있다. ▲ ..
1954년 6월 16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린 제5회 스위스 월드컵에 한국은 자국으로서도 첫 출전이자 아시아 독립국 최초의 월드컵 본선 출전국으로 참가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본선 무대를 밟기 위한 아시아예선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국이 출전을 포기하면서 아시아에 걸린 한 장의 티켓을 차지하기 위해 홈과 원정을 오가는 한일전이 성립되었는데, 일본대표팀의 입국을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2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러지게 된 것이었다. ▲ 1954 월드컵 아시아예선 출선 선수들. (위) 정상희 단장, 이유형 감독, 박규정, 홍덕영, 이종갑, 이상의, 김지성. (아래) 민병대, 강창기, 최광석, 정남식, 최정민, 성낙운, 박일갑. ▲ 1954년 3월 7일, 도쿄 메이지 신궁 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아예선 1차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