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완용의 마지막과 무덤의 현재 모습

이완용(李完用). 현재 한국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매국노의 대명사이다.

살아생전에는 부귀영화 속에서 큰 권세를 누렸고, 죽어서는 사이토(齋藤實) 제3대 조선 총독 등 50명의 장례위원과 1,3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그의 3천 평짜리 저택이 있던 옥인동 19번지부터 광화문까지 어마어마한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 이완용(1858년 7월 17일~1926년 2월 12일)

 

■ 동아일보의 돌직구 사설

그가 사망한 다음 날, 동아일보는 1926년 2월 13일 자 1면에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다. 비록 겉보기에는 성대한 장례식이었으나 민중과 언론의 속내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동아일보 1926..02.13

하지만 일제의 귀족인 이완용을 비하하는 것을 조선 총독부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총독부는 일제 당국의 금지령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동아일보 2월 13일 자는 물론 이완용을 비난하는 기사들을 모두 싸잡아 발행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동아일보는 해당 사설을 빈칸으로 두고 호외로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 삭제된 동아일보 호외

다음날인 14일 자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본보 압수'라는 제목의 해명기사를 통해 13일 자 사설의 삭제 경위를 밝혔다.

 

본보 압수: 2월 13일부 발행 본보 제1995호는 기사 중 당국의 기휘(忌諱)에 저촉된 바가 유(有)하야 발매금지의 처분을 당하얏기로 해저촉(該牴觸)된 기사는 삭제하고 호외(號外)로 발행반포(發行頒布)하얏삽기 자(玆)에 근고(謹告)함. (동아일보사)

 

■ 삭제된 사설 전문: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보호순사(保護巡査)의 겹겹 파수(把守)와 금성철벽(金城鐵壁)의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듬 하나는 어찌하지를 못하였으며 들어난 칼과 뵈지 않는 몽둥이가 우박같이 왕집(往集)하는 중에서도 이내 꼼짝하지를 안하던 그 달라진 동자(瞳子)도 염왕(閻王)의 패초(牌招) 앞에서는 아주 공손하게 감겨지지 않지를 못하였구나. 이때이었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이었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악랄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독배이다. 너의 시렁이 빠지도록 무겁게 실린 관기훈장(官記勳章)과 너의 고앙이 꺼지도록 들이쟁인 금은재백(金銀財帛)도 이때의 너를 도움에 털끝만한 소용이 없음을 다른 사람 아닌 네가 출출히 샅샅이 매감(昧感)하게 될 마당이 이제야 닥쳤다.

만(萬)을 반절(半截)한 온갖 덕형과 천(千)을 양만(兩萬)한 많은 생맥(生脈)을 귀떨어진 쇠조각으로 바꿀 때에는 그런 것이나마 천사만사(千斯萬斯) 누릴줄 알았지마는 이제 와서는 모두 다 허사임을 깨닫고 굳어가는 혀를 깨물 그때가 왔다.

이럴 줄 몰랐다 할 그럴 때를 당한 너의 감회가 어떠하냐. 모든 것이 다 몽환(夢幻) 같고 포영(泡影) 같건만은 오직 하나 추치오욕(醜恥惡辱)만이 만고의 현실로 떨어짐을 깨닫게 된 이때에 너의 심내야 그래 어떠하냐.

학부(學部)의 구실만 치르고 말았어도 하는 생각도 나지. 아니 애당초에 대가(大家)의 양자로 들어가지 말고 시골서 땅이나 파다가 말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나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마지막 눈을 감음에는 너의 어제까지 옳게 알던 것이 하나도 오늘의 너를 고뇌전민(苦惱煎悶)케 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새삼스러이 기막혀 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아까까지도 눈을 깜박거리면서 자기 변호할 말이나 생각하고 자기 위안할 길이나 찾았겠지마는 60여년의 완운농무(頑雲濃務)가 다 걷혀지고 천량(天良)의 월륜(月輪)만이 둥그렇게 낭조(朗照)하는 이 마당에서 보지 말자 하여도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더러운 뼈다귀 부대를 데미다 보고야 안치고 달라진 네 눈에선들 걷잡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어찌 아니 쏟아질 것이냐. 이제는 나막신 친구의 알랑거리는 빛도 너의 눈에서 떠날 것이며 한 구덩이 여우들끼리의 서로 위로하던 말도 너의 귀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 눈이 감기면서 떠지는 새 눈 앞에는 다만 이의(理義)와 오직 법도(法度)의 삼엄 위숙(威肅)한 세계가 나설 것이다.

이때까지 궁구하기를 나는 죽으면 열종(列宗)과 광왕(光王)과 깨끗한 조상네들에게 대면하지 아니할 딴 저승으로 살짝 도망해 가리라 하였을지라도 염부(閻府)의 네 대접이 어디서와 같을 리 없으매 너를 위하여 딴 길을 갈 리가 있을 것이냐. 계정(桂庭)의 높은 대문 앞도 지나지 아니치 못하며 포은(圃隱)의 빛난 동내속으로도 나가지 아니치 못하리니 그때마다의 퍼다붓는 모닥불이 네 몸을 안팎으로 태우고 또 태울 일이 딱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환영의 기(旗)라도 들고 나올 듯한 송삼조사(宋三趙四)도 비(鄙)에는 휴가 없으매 찾아보이지 아니함이 그 중에도 못내 섭섭 쓸쓸하겠지.

사람의 현사(顯思)가 무서운 것이 아니요. 귀신의 음의(陰議)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것저것을 면하자면 면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회간윤교(檜姦倫巧)도 면하지 못한 구경(究竟)의 일사(一死)요, 일사 이후(一死以後) 영원한 공벌(公罰)이다. 무섭고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갈수록 붇고 더하여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 영원한 형징(刑懲)의 앎이다. 이렇게 살아서의 미안가찬호거선식(美眼佳饌好居善飾)이 얼마나 유연이 체(體)에 적(適)하고 현당(顯當)이 심(心)에 칭(稱)하였을지라도 그것은 꿈같은 시대의 얼이다.

영원한 업보(業報)의 제몸에 얽매임과 항구(恒久)한 추매후세(捶罵後世)에 떨어져감에 비(比)하여서는 그것이 달고 맛갈스러울 수는없다. 목숨은 짧은데 의(義)는 길며 사람은 몰라도 법은 엄하다. 누가 불의의 부귀로써 능히 신후(身後)를 유윤(裕潤)케한 자이냐. 누가 일대의 영화(榮華)로써 능히 만고의 적막으로 면(免)한 자이냐. 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이냐. 서로령(棲露嶺)의 꽃이 모두 악왕묘(岳王墓)를 위하여 아름다운 향기를 뿜는 일변에 서호유객(西湖遊客)의 편리(便利)가 온통 무추상(繆醜像)을 향하여 더러운 냄새를 끼얹는 것만이 어찌 충간(忠姦)의 현보(顯報)라 하랴. 보이지 않는 천하의 오예(汚穢)가 형상 없는 추상(醜像)을 벌책함은 일찍 일각(一刻)의 관완(寬緩)이 없으리니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문서는 헛것을 하였지마는 그 괴로운 갚음은 영원한 진실임을 오늘 이 마당에서야 깨닫지 못하였으랴.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을 그만하면 내놓지! 악랄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 이완용이 사망한 저택 입구에는 현재 옥인파출소가 들어섰다.

 

■ 이완용 무덤의 위치

이완용은 이미 생전에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여 조선 최고의 지관들을 동원해 명당자리를 물색한 끝에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에 있는 선인봉 중턱의 첩첩산중을 영면의 장소로 택했다.

 

▲ 이완용 무덤 위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묘를 사용했다', '도굴범들을 막기 위해 비밀에 부친다'는 소문도 돌았으나 그가 죽고 난 얼마 후 1926년 3월 3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강경에서부터 낭산까지 새로운 도로를 개통하느라고 주민들을 강제로 공사에 동원하여 지역주민들이 분개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마도 후손들이 첩첩산중인 묘소를 방문하기 쉽도록 도로공사를 한 것으로 보이며, 위치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또, 1926년 5월 4일의 동아일보에는 이완용 묘소가 누군가에게 파손되어 보호 순사를 배치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위). 여기에도 이완용 묘의 주소가 전북 익산군 낭산면 산내동으로 숨기지 않고 상세히 나와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완용 묘비 훼손범 체포. 동아일보 1932.09.18

그밖에도 후손들과의 다툼으로 생긴 원한으로 이완용의 묘비에 해코지를 한 사람이 체포되기도 하는 등, 이완용의 묘는 단지 접근하기가 어려운 첩첩산중이었을 뿐, 무덤의 위치를 숨겼다는 이야기는 헛소문이라는 것을 여러 기사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미 한일합방 후 15년이나 지났고, 강대국 일제의 지배는 영원할 것처럼 여겨졌던 시대였기에 기세등등한 귀족가문이 두려움에 숨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 재등장과 함께 사라진 이완용의 무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던 이완용 묘소의 존재는 그가 사망한 지 53년 만인 1979년,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완용의 무덤이 이제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표한 사건이었다.

 

▲ 이완용 관뚜껑 판매기사

1979년 8월 20일 자 경향신문의 기사는 이완용의 관뚜껑이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팔렸음을 전하는데, 이것은 이완용의 무덤이 파헤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조사에 따르면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과 후손 4~5명이 이미 같은 해 4월 23일 묘지를 찾아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폐묘 후 유골을 꺼내 간이화장하고 인근의 장암천에 뿌려버렸다고 전해진다.(이때 조부모인 이항구 부부의 묘도 함께 폐묘한 것으로 밝혀졌다)

 

▲ 선인봉과 근처 장암천 간의 거리

떠도는 일설에는 매국노라는 주위의 손가락질 탓이었는지 ‘오래 둘수록 치욕만 남는다’는 이유로 증조부의 흔적을 말살시켜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이완용 가계도, 이석형은 이병주의 아들

당시 묘지관리인이었던 최병기 씨에 따르면 무덤에는 잡초가 쉴 새 없이 자라고 가시 돋친 아카시아가 수없이 뻗쳐 나와 관리가 힘들 지경이었다고 한다. 치욕을 감내하기도 힘들고 관리도 귀찮아 황폐화되느니 겸사겸사 없애자는 판단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이완용의 무덤

폐묘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도 묘의 관리가 너무 엉망이어서 이완용의 무덤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게다가 무덤을 파헤치자 이완용의 관은 마치 포승줄로 죄인을 묶은 듯이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로 감겨 있었다고 한다.*

'목렴(木廉)'이라고 하는 것으로 무덤 속의 시체(屍體)에 나무뿌리가 감기는 재해이다. 풍수학에서 크게 금기시되는 현상이다.


사실 목렴이 발생했다거나 무덤 내부의 훼손 여부는 악인을 욕하기 위한 과장이 있을 수 있다.


당시 폐묘 현장에는 낭산면 부면장과 낭산 지서 경찰관도 입회하여 찾아온 사람들이 이완용의 후손임을 확인하고 작업 과정을 참관했다. 참관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완용의 관은 가죽나무에 옻칠을 했고 생석회로 둘러싼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며, 가로 45cm x 세로 180cm x 두께 6cm의 관뚜껑은 53년이 지났는데도 원형이 썩거나 손상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부부가 합장된 형태로 시신은 완전히 썩어 있었으며, 부장품으로는 석재 항아리 1개와 생시에 입었던 관복, 일생의 행적이 기록된 지석(20×30Cm), 평상복 서너 벌, 금니 2개가 나왔는데 후손들은 항아리만을 챙겼고 금니는 인부들에게 품삯으로 주었다.

관련글: 이완용의 부인 조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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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입국한 최초의 조선 여인들 이완용(1858~1926)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만, 그의 부인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무래도 시대가 시대인만큼 이름도 '양주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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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추원은 구한말 조선총독부의 어용자문 기관이며 우봉(牛峯)은 이완용의 본관

관뚜껑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2위 대훈위 후작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牛峯李公之柩)' 라는 묘의 주인이 매국의 대가로 얻은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직함이 많은 것으로 위엄을 드러내던 시절, 그가 얻은 수많은 직함들 중 오로지 일제로부터 얻은 벼슬만이 적혀있어서 사람들은 '이완용은 죽어서까지 일제에 충성한 뼛속까지 매국노'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국가의 벼슬까지 관뚜껑에 적었을 대한제국 출신 관리가 있기나 했을까.

 

▲ 현재는 채석장으로 변한 이완용 묘터

이 관뚜껑은 당시 인부로 일했던 유종식 씨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집으로 가져와 보관하다가 이를 본 낭산면사무소 직원이 원광대 박물관측에 알렸고, 박물관 측은 유씨로부터 5만 원(현재가치 약 100~150만 원)에 사들였다. 하지만 현재 원광대에는 이 관뚜껑이 남아있지 않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었던 박순호 교수는 "소장 직후 이완용의 친척 되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박진길 총장님을 설득해 관뚜껑을 가져가 태워버렸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태우는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닌 만큼 어딘가의 개인 창고나 지하 수장고에 존재할 일말의 가능성은 남아있다.

(이병도 박사가 이완용의 조카나 손자라는 것은 낭설이다.)

'이완용 평전(윤덕한 저)'에 따르면, 장례식에서 사용된 후 함께 묻은 붉은 비단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등을 적은 깃발)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로 관속에서 발견되어 원광대에서 이를 보존하였는데 이완용의 손자뻘('병'자 항렬) 되는 먼 친척인 역사학자 이병도가 이 명정을 가져가 자신의 집에서 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아마 관뚜껑과 혼동된 부분인 듯싶다.


- 최초등록: 2014.09.05.

- 최종수정: 20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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