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과 아들 이항구의 안하무인

어보(御寶)가 도난당했는데 골프에 빠진 책임자 이항구

- 종묘(宗廟) 내의 절도는 오백 년 내 처음 발생한 일
- 종묘 안에 도적 들어간 전말
- 범인 수색은 단서도 못 얻어

종묘 안 영령전(永寧殿)에 안치되어 있던 덕종(德宗), 예종(睿宗) 양조의 어보가 분실되었다.

당일 밤에는 전사보(典祀補) 홍성두(洪性斗)씨가 수직(守直)을 하였었는데 전례에 의하여 밤 10시와 새벽 3시에 두 번이나 순시를 하였으나, 발 속에 가려져있는 자물쇠가 비틀어졌으며 도적이 들었던 것은 꿈에도 몰랐었다 한다.

전사(典祀) 정만조(鄭萬朝)씨는 노병으로 인하여 자리에 누웠다가 이 사변이 난 이후에는 병든 몸을 무릅쓰고 매일 창덕궁에 출근하여 무슨 처분이 있기만 기다리는 중인데, 아직도 범죄의 단서는 얻지 못한 모양이다.

야노(矢野) 창덕궁 경찰서장은 작 12일에는 아침부터 종로서와 경찰부를 방문하고 범인을 체포할 계책에 대하여 협의가 있었는데, 본시 종묘는 창덕궁 경찰서에서 경위할 책임이 없는 곳임으로 이번 기괴한 절도사실도 종로서 사법계에서 중심이 되어 처리할 터인데 경찰부 형사과를 위시하여 종로서의 사법계와 그 외 각 경찰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오백년래로 이 같은 사변은 한 번도 없었으며, 다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어떤 자 한 명이 종묘 압전 안에 들어가 숨었던 사실은 있었으나 이번 같은 피해는 없었으며 조사한 결과 그자는 정신병자인 것이 판명되어 즉시 방면된 일은 있었다더라.

【동아일보 1924.04.13】

- 골프놀이에 취한 이왕직 차관과 예식과장

종묘에 사변이 일어나자 위로는 이왕 전하를 위시하여 창덕궁 내는 주야로 초조한 빛에 싸여있으며, 더욱이 전하께서는 거의 침담(寢啖)을 잊으시고 "어보를 찾았느냐" 고 시시로 근시(近侍)에게 하문이 계시어 실로 봉답할 길을 모르고 있다.

이때 이왕직의 주례자가 되어 소위 이번 사건의 직접 책임자가 된다 하는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䇿, 1872~1946))씨와 예식과장 이항구(李恒九, 1881~1945)씨는 재작 11일 아침부터 자동차를 몰아 용산 효창원(孝昌園)에 이르러 날이 맛도록(온종일) 『골프』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하니 과연 이것이 그들의 취할 바 가장 온당한 도리겠는가.

차관과 장관은 골프놀이에 재미만 보고 지내니 그런 도리가 있을까 하여 이왕직 안에도 불평이 많으며, 이 사건에 대하여 민장관은 다만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을 뿐이니 과연 그들의 태만한 죄책은 어찌나 증치되겠는가 하여 종척과 귀족 간에 이미 비난이 높다더라.


1924년 4월 9일, 종묘의 어보(왕실의 의례용 도장)가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비의 순찰시간을 피해 자물쇠까지 부수고 탈취한 것으로 보아 전문털이범이거나 종묘 내부에 결탁한 자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다.

그런데 이왕 전하 순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어보의 행방을 묻는 상황에서, 정작 책임자인 이왕직의 일본인 차관과 예식과장인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골프를 치러 다녔다는 기록이다. 그래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살아있던 시점이고, 이왕직 장관 민영기(閔泳綺, 1858~1927)가 그보다 23살이나 연장자임에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는 기세 등등한 모습이다.

■ "쓸모없는 것 잃어버렸다고 놀지도 못한단 말이냐!"

- 이항구(李恒九)씨)의 폭언
- 이 무슨 무엄한 말이냐

이왕직 예식과장 남작 이항구(李恒九)씨는 종묘에 보관되어 있는 어보가 도실되어간 곳을 알지 못하는 중대사건이 있는 때에 조금도 근신한 태도가 없이 『골프』 놀이로 시간을 보낸다 함은 기보한 바와 같으며 동씨의 이 무엄한 태도에 대하여는 누구나 눈살을 찌푸리는 터였다.

이에 대하여 동씨는 각사 신문기자가 모여 앉은 공개석상에서 기탄없이 쾌쾌한 말을 하기를,

"종묘의 어보라는 것은 당장 나라에서 쓰시는 것도 아니요. 승하하신 후에 만들어 놓은, 돈으로 쳐도 몇 푼어치 안 되는 것인데 그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골프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술을 먹거나 계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려!"

이와 같이 말하였다.

【동아일보 1924.04.15】

아!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마는 당장 왕가의 은총을 받는 몸으로 더구나 예식과장의 직접 책임자로서 선왕의 어보는 고사하고 종묘 안의 티끌 한 점이라도 외인의 손으로 무엄히 침범된 때에는 응당 황공무지한 태도로 근신대죄 하여야 될 것이거늘 이 막중대사를 앞에 놓고 어찌하여 분실된 단서도 얻기 전에 이 무슨 무엄한 태도이며 이 무슨 무엄한 말씨냐.

종묘에 보관된 물품을 일일이 금전으로 쳐야 몇 푼 안되므로 소중하지 않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이냐. 이것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나왔다면 구태여 나무랄 것도 없겠지만 왕가의 존엄을 위하여 존재하는 이왕직 고관으로 이 말을 차마 한다면 무슨 말을 못 하겠느냐!


그 뒤에 이어진 기사는 더욱 가관이다. 요즘이라면 국가에 중대사가 발생한 상황에서 담당 고위공무원이 유흥을 즐기다가 발각되었다면 사과를 하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이항구는 오히려 당당하다.

"어보라는 물건이 당장 쓰는 것도 아니고 몇 푼 되지도 않는 것인데, 그거 없어졌다고 골프도 못 친다는 거요?!" 라며 기자들을 모아놓고 윽박을 지르고 있으며, 심지어 "집에서 술을 먹거나 계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네?"라며 한술 더 뜨는 모습에서 이완용 가문의 권세가 느껴진다.

당시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한창수(韓昌洙, 1862~1933)도 "원래 '보'라는 것은 왕의 신위 앞에 놓아두는 것으로 주석에 도금을 하는 금보가 있고, 흙으로 빚어 은으로 도금하는 은보가 있으며 분실될 염려가 있어서 별로 값나가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라고 변명했다.(時代日報 1924.04.13)

이때 도난당한 어보는 결국 찾지 못했고, 결국 이왕직에서는 조선미술품제작소를 통해 복제품을 제작해 종묘에 안치했다. 이후 새로 제작된 어보도 어떤 경로로 반출되었는지는 모르나 미국의 시애틀미술관에 있던 것을 지난 2015년에 환수한 바 있다.

▲ 반환된 덕종 어보 【국립고궁박물관】

그런데 이항구와 이왕직 측의 '도난당한 것은 몇 푼 되지 않는 어보'라는 해명은 사실과 달랐던 것 같다.

당시 국립고궁박물관은 반환된 어보가 복제품이라는 것을 뒤늦게 파악하고 성분을 비파괴 방식으로 분석했는데, 15세기에 제작된 어보들은 금 함량이 60%가 넘는 고가의 보물이었다. 반면 1924년에 새로 만들어진 어보는 구리 함량이 70%를 넘어가는 가치가 현저히 낮은 재료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 "가난해서 세금 못내!" 이완용 부자의 세금 체납

- 조선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朝鮮中樞院副議長李完用)
- 학교비(學校費)를 절대 불응
- 나는 재산이 적어서 학교비를 낼 수 없다고
- 차압도 못하는 곡 부윤은 국궁 배례만 몇 차례
- 이완용 가문의 철저한 재산 모으는 방법

전 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현재 중추원 부의장으로 있는 이완용 후작과 그 둘째 아들 이왕직 예식과장 종사위훈이등 이항구 남작이라 하면 누구나 다 그가 조선에 몇째 아니 가는 큰 부자로 수천만 원, 수백만 원의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후작에게 부과된 오등 호별할 3,800원과 이남작에게 부과된 400원을 절대로 내지 않겠다고 납세에 응하지를 않음으로 경성부에서는 그 지위를 돌보아 여러 번 간담적으로 권고를 하였으나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수일 전에는 다니 다키마(谷多喜磨, 1884~1952) 부윤이 친히 자동차로 이후작을 방문하고 보통학교 교육을 위하여 호별할을 내주면 고맙겠다고 권고를 하였으나 완강히 거절을 하였으므로 부윤은 무료히 돌아왔다.

그 후에 이남작으로부터 도리어 '자기네의 총재산은 이것밖에 없는데 호별할이 비싸니 차압을 당하더라도 낼 수는 없다'는 최후통첩 비슷한 회답이 부윤에게 돌아왔는데 아무리 속과 뜻이 다른 후작 가문의 일이라 하여도 행실이 여기까지 미처서는 기막힐 일이라고 일반은 새삼스레 놀라며 타매(唾罵)하기를 말지 않는다더라.


아무리 돈이 아깝더라도 전재산에 비교하면 창해일속(滄海一粟)만 못한 3~4천 원의 적은 돈을 안 내자고 바둥거릴리는 없는 것이고 안내겠다는 이유가 있다기에 알아본 즉, 금년 5~6월경에 호별할이 적다 하여 재산을 조사하여 본 후에 육등에서 오등으로 한등이 올라 민영휘(閔泳徽, 1852~1935)씨와 동액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작의 의견은 '민영휘씨는 자기보다 재산이 더 많은데 왜 동등이냐'고 이에 불만을 품어 안내기로 결정을 한 모양인데, 실제로 민영휘씨는 재산이 이후작보다 많기는 많으나 작년도에 백만 원이라는 많은 돈을 휘문학교에 떼어놓고 또 민영휘씨 가정에는 십 수명이나 각각 호별할을 내는 처지이니 이것을 비교하여 보면 이후작은 오히려 적으리라고 한다.

【동아일보 1924.12.25】


- 무책임한 경성부
- 불쌍한 사람은 차압하면서 후작은 왜?
- 이후작을 집행 안 하면 다른 사람도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학교 평의원 모씨는 "그 문제는 벌써부터 말썽 중이던 것입니다. 원래 이후작이라 하여 말할 것도 못됩니다마는 나는 도리어 경성부 당국의 태도에 분개합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부민에게서는 기한만 넘으면 하나뿐인 솥이라도 빼가고 숟가락 한 개라도 차압하지 못하여 애를 쓰면서 왜 이후작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경성부 당국에서는 단연한 태도로 강제집행을 하여야 될 것입니다. 만일 이후작에게 손을 대지 못하겠거든 다른 부민에게도 절대로 차압수속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더라.

 

▲ 이완용 일가. 앉아있는 이완용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이항구

이완용 부자는 부과된 세금도 '너무 많이 나왔다'며 내지 않고 버틸정도였는데, 이 세금을 받기 위해 일반관리도 아닌 일본인 부윤(지금의 서울시장)이 직접 나섰음에도 결국 받아내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내지 못하겠다는 이유도 '민영휘가 나보다 더 재산이 많은데 왜 세금액수가 같냐'는 것.

여론과 경성부 당국은 절대 봐주지 말고 세금을 강제집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완용 부자의 버티기에 항복한 경성부

- 권세에 굴복한 경성부
- 아직까지 이완용의 세력이 엔간하여 필경 경성부를 꺾고 자만
- 연내 문제되던 이완용 학교비 반액 감하로 해결

이완용 후작과 그의 아들 이항구 남작이 경성부에 납부할 학교비 호별할(學校費戶別割) 4,000여 원을 너무 많아 못 내겠다고 뻗대면서 기한이 지난 지 반년이 넘도록 내지 않은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그 후 경성부 당국과 이완용 후작 양쪽의 태도가 피차 자못 강성하야 경성부는 일시 '이완용 후작의 재산차압을 하겠다'고까지 얼러메었으나 이완용 후작은 끝끝내 오등급(五等級) 3,885원은 과중한 부담이라고 이의를 고집하였다.

이에 경성부에서도 할 수 없이 재산 재조사를 명령하고 몇 날을 지낸 후, 결국 5등급에서 5등급을 감하야 10등급(十等級)을 만들어 3,885원의 약 반액인 1,800여 원으로 경감한 까닭에 이완용 후작은 이에 대하여 대단히 좋아하여 지난 17일에 그 경감한 1,800여 원을 경성부에 납입하였고, 이항구 남작도 이완용 후작이 감액되는 동시에 즉시 납부하여 오랫동안 말거리가 되어오던 이 문제는 경성부의 굴복으로 우선 탁착된 모양이더라.


【동아일보 1925.07.01】

- 재조사 결과로 감액했다.
- 양보한 것이 아니라고

이완용 후작의 학교비 호별할을 감액한 사실에 대하여 그 담당자인 경성부 고교 재무과장(高橋財務課長)은 말하길,

"이완용 씨의 학교비 호별할 감액은 결코 경성부에서 양보한 것이 아니라 재산을 재조사한 결과, 과연 5등급은 과중한 부담이오 10등급이 맞겠으므로 신중히 생각한 결과 그같이 결정한 것이오. 이항구 남작은 감액하지 아니하고 납부하였습니다." 하더라.


파워게임 끝에 결국 이완용의 세금은 50%나 감액되었다. 돈이 없다던 이완용도 기분좋게 납부 완료.

강제차압으로 으름장을 놓던 경성부도 '재산 재조사를 해보니 세금 부담이 과중했다'며 여론을 의식한 궁색한 변명을 하며 꼬리를 내렸다.

이완용은 반도 최고의 거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금 체납과 관련된 추문이 이어졌던터라 사망 당시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을 그만하면 내놓지!"라는 유명한 사설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친일파 이완용의 마지막과 무덤의 현재 모습

이완용(李完用). 현재 한국에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매국노의 대명사이다. 살아생전에는 부귀영화 속에서 큰 권세를 누렸고, 죽어서는 사이토(齋藤實) 제3대 조선 총독 등 50명의 장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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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탐욕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이항구

- 이항구 남작에 손해배상 청구
- 이완용 후작이 사준 집 팔았다고 토지관리인 결국 승소

이항구 남작이 토지관리인에게 오천 원의 손해배상을 물게 된 판결이 있다.

시내 공평동(公平洞) 31번지 심상덕(沈相德)은 지난 6월 상순 옥인동(玉仁洞) 이항구 남작을 상대로 오천 원 손해배상의 청구소송을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제기하였었는데 16일에 피고의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사건 내용은 심상덕은 명치 42년(1909년) 봄에 당시 고 이완용 후작의 집에 토지관리인으로 채용되었었는데, 그 이듬해 명치 43년 일한합방이 선포되자 민중이 이후작의 저택을 습격 방화하고 폭행을 하였다.

그때에 나이 어린 이항구 남작이 미처 피신을 하지 못하여 생명이 위급하게 된 것을 심상덕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가 구해온 사실이 있었다.

【동아일보 1935.07.19】

이에 대하야 이완용은 '아들의 생명의 은인'이라며 그 사례로 공평동 31번지에 집 한 채를 사주되 '심상덕은 가난한 터라 팔아먹을 염려가 있다'하여 명의는 이항구 남작의 것으로 해두고 영구히 그 집에서 살기만 하라고 하였었다.

그리하여 심상덕은 지금까지 그 집을 자기 소유나 다름없이 지니고 살아왔는데, 금년 2월 16일에 이항구 남작은 전기 가옥을 손인모(孫寅摸)라는 사람에게 대금 오천 원을 받고 매도하였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원고가 청구한 것인데 경성지방법원에서는 「그 가옥이 비록 명의는 피고의 것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상 원고의 소유인데 불구하고 그와 같이 처분한 것이니, 그 처분금액에 상당한 오천 원의 손해를 원고에게 배상할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판결을 내렸다.


이항구의 배은망덕한 성품과 돈에 대한 탐욕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한일합방 당시 성난 백성들이 이완용의 저택을 방화하고 폭행을 가하는 혼란한 상황에서 집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가 아들 이항구를 구하는 사건이 있었다. 3,800원의 세금을 아까워하던 이완용이 5,000원짜리 집을 사서 보은을 할 정도면 상황이 보통 급박했던 것이 아니었던 모양.

그런데 집을 줄려면 그냥 줄 것이지 '팔아먹을 수도 있다'며 명의를 집사가 아닌 아들 이름으로 해놓는 바람에 이항구가 본인 마음대로 매도했다가 고소를 당했다는 사건이다.

'어린 시절이다 보니 은혜를 망각했을 수도 있겠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기사에서만 '어린'이라고 표현했을 뿐 1881년생인 이항구는 1910년에 이미 30세였다. 천하의 이완용 가문이었지만 당시 판사가 보기에도 어처구니가 없는 배은망덕이었는지 결국 이항구의 패소로 판결되었다.

▲ 이왕직 장관에 취임한 이항구 【조선일보 1940.03.14】

오늘날 이완용 가문은 한국의 건국 이후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어 한반도에 발붙이고 살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정작 이항구는 이왕직 장관을 역임(1940~1945) 하는 등 한평생 권세를 누리다가 일제의 패망을 불과 5개월 앞둔 1945년 3월 6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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