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 잭 다니엘스

잭 다니엘스(Jack Daniel's)는 미국 테네시(Tennessee) 주(州)의 1등급 옥수수만을 사용해 만든 위스키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미국산 위스키 제품이다.

 

이 위스키는 재스퍼 뉴턴 "잭" 다니엘(Jasper Newton "Jack" Daniel)이라는 사람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술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술이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주조자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잭 다니엘' 하면 사람보다는 위스키의 대명사가 되었다.

 

 

 잭 다니엘스 위스키의 탄생

온라인을 통해 그의 나이를 검색해보면 출생 연도가 194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1868년, 약관 20세의 나이에 증류소를 등록했다' 고 기록되어 있어서 1949년생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잭 다니엘의 조부모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 이민자였다. 십 남매의 어머니였던 그의 모친은 막내인 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재혼하였고, 계모와의 사이에 3명의 자식을 더 낳았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어린 시절 그가 별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을 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결국 잭 다니엘은 7세 때 가족을 떠나 루터교 목사인 댄 콜(Dan Call)을 따라가 머슴살이를 시작했는데 댄 콜은 당시 목사답지 않게 위스키 증류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댄 목사로부터 위스키 제조법을 배운 그는 1863년 증류소를 인수하였으며 1875년에는 자신의 증류소를 정식으로 등록하였고, 이 기록은 미국 최초로 등록된 증류소로 남게 되었다.

 

《 증류소의 숯을 만드는 모습 》

그는 1등급 식용 옥수수, 최고급 호밀과 맥아, 특수 배양한 이스트, 무어 카운티(Moore County) 계곡 주변의 언덕에 내린 눈과 봄비가 석회암에 여과되어 만들어진 철성분이 없는 맑은 샘물 등을 위스키 제조에 사용하였다.

 

 또 완벽하게 태운 사탕단풍나무 숯을 적당히 분쇄하여 3m 높이의 거대한 용기에 채운 뒤, 갓 증류된 위스키를 다시 한번 목탄층을 통해 오랫동안 천천히 거른 다음 속이 그을린 미국산 화이트 오크 통에 담아 숙성시켰다.

 

이 과정을 챠콜 멜로윙이라고 하는데 이런 주조 과정으로 당시 위스키 증류소가 많았던 테네시에서 그만의 차별화된 위스키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잭 다니엘스의 7대 마스터 제프 아넷(Jeff Arnett)》

더욱 중요한 것은 완성된 위스키의 최종 품질을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시음자(마스터)의 냉철한 판단으로 그 맛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런 점 때문에 잭 다니엘스 위스키의 맛은 1875년의 맛과 동일하다고 한다.

 

이 맛을 결정하는 시음자는 개발자인 잭 다니엘스 본인을 포함하여 140여년간 단 7명만이 존재한다.

 

잭 다니엘의 위스키는 처음에는 테네시의 여러 위스키 중의 색다른 위스키 하나일 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테네시 위스키'의 대명사로 군림하게 되었다.

 

 

잭 다니엘 올드 넘버 7, 숫자 7의 의미는?

'잭 다니엘스 올드 넘버 7' 은 1890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위스키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획득하며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위스키 이름 속의 숫자 7의 의미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행운을 의미하는 숫자 7을 붙였다는 설'과 '잭 다니엘의 애인이 7명이라서' 그렇게 정했다는 설.

 

두번째 설에 대한 근거로는 생전 잭 다니엘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여성과 데이트를 한다는 소문이 많았다. 실제로 그의 유족은 무덤에 찾아오는 수많은 여성들이 앉을 의자를 비치해두기도 했을 정도였다.

 

《신장 5피트 2인치(약 157.48cm)에 불과했던 잭 다니엘》

놀랍게도 언론이나 소문을 통해 그의 애인이라고 주장한 여성들은 7명이 아니라 12명이 넘었으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의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술꾼답게 여자도 밝힌 셈이었지만 젊은 여성들을 후리고 다니는 난봉꾼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무어 카운티에 있는 교회란 교회들은 모두 잭 다니엘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기부금을 전해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잭 다니엘, 생년이 오락가락하는 이유

온라인을 통해 그의 나이를 검색해보면 출생 연도가 194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1868년, 약관 20세의 나이에 증류소를 등록했다' 고 기록되어 있어서 1949년생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 잭 다니엘의 비석, 1850~1911이라고 적혀있다 》

하지만 잭 다니엘스의 본사 홈페이지에는 그의 생년이 1850년으로 되어 있고 잭 다니엘의 비석에도 '1850년 출생'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의 생년이 1850년으로 확정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의 생년은 잭 다니엘 본인조차 정확히 몰라서 생전에 말한 적이 없었다. 잭 다니엘의 출생기록 서류를 보관한 법원이 화재로 소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얼마 후 사망해버렸고, 아버지는 13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웠을 테고 더군다나 7살 때 집을 떠나와 버렸으니 물어볼 곳도 없었던 것.

그렇지만 1849년생이라든가 1850년생이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은 의외로 쉽게 밝혀졌는데, 출생기록은 불타 사라졌지만 어머니의 사망기록은 잘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작가의 추적에 따르면, 잭 다니엘의 모친은 1847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1849년에 그를 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현재는 그의 출생을 1846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생년은 모르지만 그의 생일은 9월 5일로 지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만들어진 신화

《 현재는 박물관이 된 증류소 》

사업이나 인물이 성공하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가공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

사람들은 그의 생년을 1950년으로 믿고 있었고, 불과 16세인 1866년에 위스키 사업을 시작했다고 자처하고 다닌 잭 다니엘의 애칭은 '소년 주조가(酒造家)'였다.

 

많은 위인들이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는 이야기처럼 그도 스스로를 '술의 신동'으로 특별하게 만든 셈이었다. 잭 다니엘스 본사도 1866년을 회사의 탄생연도로 주장하고 있지만 1875년까지 연방정부는 물론 어떤 공공기관에도 해당 부지에 공장이 등록된 기록 서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증류소의 최초 등록은 1875년이었고, 그의 실제 출생 연도로 추정되는 1846년을 토대로 나이를 계산하면 젊은 나이긴 하지만 신동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29세에 증류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잭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잭 다니엘의 부친은 13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자라오면서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들을 대신해 잭 다니엘은 머리가 좋아 셈에 빠른 조카 렘 모틀로우(Lem Motlow)에게 증류소의 장부를 맡겼다.

 

1907년에는 총애하는 조카 모틀로우에게 증류소를 완전히 물려주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 1911년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은퇴한 잭 다니엘은 어느 날 무슨 일인지 증류소로 아침 일찍 출근하였다.

그는 사무실에 있던 금고를 열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평소 기억하던 번호가 그날따라 생각나지 않았고, 자신의 건망증에 화가 났는지 금고의 측면을 온 힘을 다해 걷어찼고 발에 상처가 났다.

잭 다니엘은 발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 상처는 도져버렸고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이 그를 결국 사망까지 이르게 했다.

《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죽음의 금고 》

망자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의 황당한 죽음은 여러 가지 말들을 낳았다.

'일찍 출근하지 마시오(Don't go to work early)'라는  말이 유행했고 '자신이 만든 위스키를 제대로 사용했다면(발에 부었다면) 감염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평생을 술과 함께 하면서 술을 자식으로 남긴 진정한 술꾼다웠다.

 

"마지막으로 한잔 주시게(one last drink, please)"

 

 

오늘날 잭 다니엘스 위스키가 살아남은 것은 조카의 공

잭 다니엘이 평생의 열정을 담아 남긴 위스키 사업은 1910년, 테네시주(州)가 금주법을 발표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조카 렘 모틀로우는 공장을 세인트루이스로 옮겼지만 물 때문인지 술맛이 완전히 달라져 판매량이 격감하였다.

 

1919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술의 생산 및 운송이 금지되는 법이 제정되었고, 1933년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도 금주법이 시행되며 위스키 제조업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이런 위기 속에 1930년대, 렘은 테네시주(州)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상원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에 전력한 결과 1937년, 테네시주에서 생산된 위스키를 해외로 팔 수 있는 개정 법안이 통과되며 위스키 생산 재개의 숨통이 열렸다.

 

1938년 10월 22일, 드디어 공장은 다시 가동할 수  있었으며 1년 후인 1939년 11월, 렘 모틀로우스 테네시 위스키(Lem Motlow's Tennessee Whiskey)라는 이름의 위스키가 생산되며 증류장은 부활했다.

 

《 렘 모틀로우스 테네시 위스키(Lem Motlow's Tennessee Whiskey)》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42~1946) 동안 미 정부는 위스키 제조금지를 단행한다.

 

전쟁이 끝난 1946년, 곧바로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었지만 렘은 잭 다니엘스 위스키의 품질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최상급 옥수수 수확을 위해 1년을 기다렸고 1947년 삼촌 잭 다니엘스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통합한 Jack Daniel Distillery, Lem Motlow, Prop., Inc(잭 다니엘 증류장-렘 모틀로우 지주회사)라는 라벨이 붙은 상품을 생산했다.

 

렘 모틀로우는 생산이 재개되는 것을 본 이듬해인 1947년 사망했으며, 1956년 위스키 제조업체 '브라운-포맨(Brown-Forman Corporation)' 사는 렘 모틀로우의 아들들로부터 잭 다니엘스를 인수하였다.

 

현재 잭 다니엘스 올드넘버7(Jack Daniel's old No.7)의 라벨에는 여전히 잭 다니엘의 이름과 함께 렘 모틀로우의 이름도 함께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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