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의 황당한 흑사병 치료법


<페스트, 아르놀트 뵈클린(1898)>


전염병은 인류문명의 발전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기원전 6천년경만해도 전세계의 인구는 서울 인구수보다 낮았고 어쩌다 타지의 사람을 구경하는 상황에서 전염병은 아직 나타날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문명이 나타나고 도시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전염병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348년, 2500만명의 사람들을 죽인 엄청난 재앙 '흑사병' 이 유럽에서 나타났습니다(아시아와 중동 사망자제외)


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사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버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렸습니다

거리는 시신으로 가득했고, 냄새만으로 이웃이 죽었는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애도할 장례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전염병이 돌기 전, 사람들은 오물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목욕은 건강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고 죽은 동물의 시체가 거리에 널려있었으며 썩은 오물들이 건물의 벽을 흐르며 하수구를 통해 강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중세 유럽의 위생상태와 흡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판자촌, 1994년 페스트 발생>


각종 미신과 점성술에 집착한 치료법들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흑사병으로 인한 희생들은 이런 사회를 불가피하게 바꾸어나가게 했습니다

그럼 당시의 황당한 치료법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하수구로 피신



일부사회학자들은 어떤 문명의 고도화를 '폐기물처리 방식의 수준'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중세 파리는 아주 고도의 문명으로 여겨질만 했는데요

영화 '레미제라블' 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파리의 하수구는 오늘날 총연장 2,093km에 달합니다

파리의 하수구 시스템은 폐기물의 처리를 용이하게 했지만 도시의 풍경을 점액질의 진흙탕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축축한 거리는 자갈로 겉모습이 포장되었고 그 아래에는 하수구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흑사병이 '지상의 공기'로 감염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자 위험한 밖으로 나다니기보다는 하수구로 다니거나 하수구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상에는 흑사병에 감염된 사람들이 있었으니 하수구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 셈이었지만 밀폐된 하수구에 보균자들이 들어오면 감염속도는 더욱 빨랐거나 혹은 더러운 하수구에서 다른 질병에 감염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결국, 파리의 하수구 네트워크는 흑사병의 빠른 확산에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 아로마테라피(Aromatherapy)



고민하던 의사들은 이 병의 원인이 악마에 오염된 안개가 공기에 섞여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인기있는 방향요법중의 하나인 아로마테라피가 치료법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향기나는 꽃을 휴대했고, 꽃을 구할수 없다면 허브잎을 주머니에 담아 휴대했습니다



사람들은 더러운 공기를 향기로 정화하려고 하였고, 바깥의 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창을 완전히 닫아 환기까지 막아버렸습니다

결국 이 요법은 흑사병에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상류층의 향수용품 발전에는 큰 기여를 했습니다



- 거머리 



당시 의사들은 이 저주받은 전염병의 원인이 혈액의 오염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정맥을 잘라 오염된 피를 빼내는 방혈(防血)법을 사용했습니다

환자들은 하늘같은 의사의 말을 믿었고 많은 수가 과다출혈과 빈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들은 당시 종기치료에 사용되던 거머리를 사용했습니다

현대에도  멸균상태에서 배양된 거머리나 구더기를 제한적인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당시에 이런 기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맥을 자르는 것보다 통증없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된 이 거머리법은 또 다른 세균감염을 불러왔습니다



- 종교


<프란시스코 고야의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


흑사병에 감염된자들이 겪는 고통과 까맣게 변해가는 끔찍한 모습은 지옥의 형벌을 재현해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의 혼란이 다가오고 위기가 닥치면 종교주의자들이 득세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고 현재보다 수십배는 더 종교적인 사회였던 중세는 말할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신의 형벌이라고 믿거나 신의 시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거리로 나와 자신을 매질하며 신의 자비를 구걸했습니다



하지만 신의 대답은 없었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던 성직자들마저 의사다음으로 빠르게 죽어나갔습니다

극단적인 사망률에 절망한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것이라며 도덕적 끈을 놓고 음탕함과 환락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흑사병이 물러가자 종교는 위기가 닥쳤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신에게 감사하기보다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흑사병에 대한 답을 내려주기를 신에게 빌었지만 신은 전혀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이교와 종파들이 생겨났고 많은 개인 교회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신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남은 삶을 즐기고자 방탕함에 빠지기도 하였고 이런 당시의 상황은 예술작품으로 나타났습니다


<죽음의 무도, 세인트 매그너스 성당>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춤을 추는 행렬은 항상 고개를 돌리면 죽음이 바로 옆에 있다는 염세주의를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 에메랄드 가루



조각낸 에메랄드의 분말을 음식이나 빵에 넣어먹거나 술에 타서 먹는 방법이 치료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리조각을 씹는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방법은 그나마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미신적인 치료법중의 하나였고, 교활한 의사들은 아예 유리조각을 에메랄드라고 속이기도 하였습니다

미개해보이십니까?

현재도 금가루는 고급음식에 사용되는데 미래의 사람들이 보면 경악할지도 모릅니다



- 소변



소변요법은 상당히 인기가 있던 치료법이었습니다

에메랄드같은 고가의 보석과는 달리 누구나 쉽게 구할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치료를 위해 오줌으로 전신을 씻어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비감염자의 오줌은 비싸게 거래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에도 소변은 마시거나 혹은 피부에 바르는 미용품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 대변혼합물



흑사병이라는 빠져나올 수 없는 물에 빠진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소변이 사용된다면 대변도 사용하지 않았을리가 없죠


<흑사병 환자의 모습, 토겐부르크 성경(1411)>


나무 수액이나 약초와 대변을 섞어 약품(?)을 만들어 몸에 바르거나 감염부위를 절개해서 안에 밀어넣기도 했습니다

이 방법은 감염 후 사망까지 이르는 기간을 급속도로 단축시켰습니다

당시 흑사병의 사망속도가 너무 빨라서 과연 이 병이 현재의 페스트가 맞느냐는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황당한 치료법들이 빠른 사망속도에 기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유대인을 죽여 세상을 정화하자



전염병이 확산되어 절망이 깊어지자 유럽인들은 비난의 타겟을 유대인으로 정했습니다

(그밖에 집시와 소수민족들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들이 물에다가 독을 퍼뜨렸다는 루머가 나돌았기 때문입니다

이 루머는 유대인 최고 지도자가 지시를 내려 유럽 각국 도시의 우물들에 독을 탔다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유대인을 죽여 세상을 정화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전염병처럼 빠르게 루머는 퍼져나가 유대인 마을 200개이상과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재판절차도 없이 화형당하는 유대인도 있었으며 일부 유대인들은 스스로 집에 불을 질러 자살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화형시키는 와중에 기독교세례를 받는 자들은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습니다

많은 유대인 부모들이 자식들에게는 세례를 받게 하고 불구덩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미신뒤에는 음흉한 음모도 존재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잡아들인 봉건영주들은 유대인에게 빚이 많았고, 일반인들도 대출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또, 각 도시의 경제 길드들은 자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유대인들을 없애기위해 흑사병의 공포에 시달리던 군중들을 선동했습니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했고, 죽은 유대인들의 재산은 영주들과 교회의 재산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유대인 살해가 심각해지자 교황은 이 사태를 비난하였고, 역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갈수 있도록 모든 죄를 사하는 특혜를 베풀어 민심을 달랬습니다


<죽음의 승리 (The Triumph of Death), 피테르 브뢰헬>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유대인들이 흑사병에서 높은 생존률을 보인것이 선동의 재료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목욕과 손발을 씻는것이 종교적인 규율로 정해져 있었기때문에 흑사병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인데요

(비뇨기과 홍보담당인지 유대인들은 포경수술을 했기때문에 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위생이 건강증진에 큰 기여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사회인 유럽에서 소위 '왕따' 즉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염병이 도시를 덮쳤던 초기에 발병집단에서 떨어져 있었던 것이 생존률이 높았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흑사병으로 죽지 않았다는 것 자체도 루머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망하면 곧바로 유대인들만의 묘지로 직행했고 그것을 보지 못한 유럽인들은 그들이 흑사병으로 죽지 않았다고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위생은 병을 예방할 수는 있지만, 하루 1000명이 죽어나가는 병의 전염에서 자유로왔을리는 만무했을 것입니다







흑사병은 유럽역사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긍적적인 면도 이끌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슬람의학은 위생과 해부학에 대한 탄탄한 지식이 있었던 반면, 유럽의학은 수백년전의 고대의학서의 이론에 정체되어 있는 '미개함' 그 자체였습니다

점성술과 미신의 횡행은 의학계의 좌절을 불러왔고, 이런 치료법들이 엉터리로 드러남에 따라 중세 유럽의학의 개혁을 가져왔습니다

교육자들은 과학을 기반으로 임상 의학에 더 중점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노동력에 손실이 일어난것처럼 교육도 당분간 중단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등교육의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흑사병을 계기로 사람들은 위생에 눈을 떴고 교회는 부검의 금지를 해제했고 의사들은 시신을 공부하여 인간의 몸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