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들

한반도 근대사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는 남아있는 자료들을 연대별로 정리해보면 경성치과의학교(1922년 설립) 제1회 졸업생인 김름이(金凜伊)와 강흥숙(姜興叔, 21)으로 확인된다.

1925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는 27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조선인 23명, 일본인 4명), 여학생이 3명이었고 이중 조선인 여성이 위의 두 명이었던 것이다.

▲ 강흥숙과 김름이 【동아일보 1925.03.23】

강흥숙은 졸업 후 5개월 후인 8월 25일 중국 상해 호강대학 재학 중인 이강희(李康熙, 27)와 결혼식을 올리고 부산에서 개업을 한 것으로 확인되며, 김름이의 행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만주에서 개업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 강흥숙과 이강희의 결혼기사 【동아일보 1925.08.25】

김름이에 비해 강흥숙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했던 관계로 비교적 행적이 두드러진 듯하다. 이강희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그녀가 부산에서 동래치과의원(東萊齒科醫院)으로 개업을 한 것도 남편 이씨의 활동 근거지라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강희는 3년 후인 1928년 6월 19일에 일제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1년 1월 1일 자 매일신보에 조선의 지식인 여성 중 하나로 등장한 강흥숙은 신년 계획을 밝히는 기사에서 조선부인들에게 치과위생을 보급하고 싶다는 포부와 함께 12월 28일에 출감한 남편과 '재미있는 가족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보였다.

【매일신보 1931.01.01】

하지만 국내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이강희는 출감후 곧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3년 3월 12일 45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 최초의 유학파 여성 치과의사, 박봉남

강흥숙과 김름이보다 1년 늦게 치과의사가 된 박봉남(朴鳳南)은 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 조선 처음의 치과 여의사

금년 3월에 동경명화여자치과의학전문학교(東京明華女子齒科醫學專門學校)를 졸업한 박봉남(朴鳳南, 25)양은 경상도 태생으로 본향에 돌아와 치과를 개업하리라고 한다.

조선 여학생 가운데 치과를 뜻하고 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던 사람이 많았으나 모두 중도에 흐지부지하고 말았지만 박봉남 씨는 꾸준히 첫 뜻을 지켜 마침내 졸업의 날을 맞은 것이다. 조선에서 치과전문학교를 마치고 치과여의(齒科女醫)가 되기는 이분이 처음이며 따라서 박봉남 씨에게 대한 기대가 크다고.

【동아일보 1926.05.01】


동경 명화치과의전에서 실습을 하는 박봉남의 사진이 함께 실린 위 기사에 따르면, 그녀는 1901년 생으로 추정되며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개업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 실습하는 박봉남 【京城日報 1926.01.28】

동아일보 기사는 박봉남을 '조선 최초의 여자 치과의사'로 쓰고 있는데 김름이와 강흥숙을 보도한 것도 동일한 신문사인 만큼 최초의 여자 치과의사를 불과 1년 사이에 혼동하기는 힘들었을 거라 보인다.

아마도 경성의학전문학교의 부속학교였던 3년제 경성치과의학교와 동경의 치과의학전문학교는 레벨이 다르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경성치과의학교 개설 당시의 입학자격은 일본인은 중학교 졸업, 조선인은 고등보통학교 졸업을 기준으로 일어, 산술(수학), 물리, 화학 등의 입학시험을 치렀으며 2년제 야간학교로 시작해(이듬해 주간 3년제로 개편) 생업을 병행하였으나 주간학교가 되자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던, 아직 자리가 잡히지 않은 신생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또한 경성치과의학교의 졸업생들은 총독부 지정학교로 의사시험을 치르지 않고 개업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는데, 이 때문인지 만주와 조선에서만 개업이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본토에서도 개업이 가능했던 치과의학전문학교 출신의 박봉남을 조선 최초의 여자 치과의사로 보도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기자의 착각일 수도 있다. 해당 기사는 박봉남의 고향도 경상도로 쓰고 있으나 다른 신문들을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정평군 춘류면 신하리로 확인될 정도로 사소한 부분에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 1926년 1월 25일자 시대일보와 매일신보 모두 함경남도 출신으로 보도하고 있다.

박봉남의 쾌거는 여러 기사를 통해 보도되었으나 졸업 후 고향에서 개업을 했는지 일본에서 계속 연구활동을 했는지 행적은 묘연하다. 이후 10년이 훌쩍 지난 시점의 한 기사 속에서 박봉남의 이름이 확인된다.

- 북평(北平)은 겨우 안정
- 피난 동포들도 본가로
- 10년간 북평에서 치과경영을 하던 고준구 씨 부부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고향을 떠나 멀리 중국 북평(북경)으로 가서 치과병원을 개업한 이래 이역 풍토에 악전고투하여 바야흐로 성공의 도에 이르자 이번 북지사변에 쫓겨서 16일 경성에 돌아온 중년의 두 부부가 있다.

그는 본적을 평양에 두고 중국 북평 동단이조(東單二條) 28호에서 고씨 부부치과의원(高氏夫婦齒科醫院)을 개업하고 있는 고준구(高俊九)씨와 그 부인 박봉남(朴鳳南) 동양치과의학사(東洋齒科醫學士)여사다.

부부는 모두 치과의사로 약 10년 전에 뜻을 멀리 가지고 초연히 고향을 떠나 이역 북평에 가서 치과를 개업하여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활동하여 오던 중, 지난 7월 7일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발발한 후, 북평 천진(天津)이 포연탄우에 싸여서 곳곳이 피바다를 이루는 참극을 연출하게 되어 인심은 극도로 흉흉하므로 고씨 부처는 마침내 고향으로 일시 안정의 자리를 구하여 돌아온 것이다.

이제 부부를 찾아 동란이 난 북평의 근황을 물은즉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의 북평은 그다지 큰 위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태풍일과(台風一過) 후와 같아서 살풍경적 불안이야 어찌 없을 수가 있습니까. 재류동포들은 사변 발발 당시에는 실로 위급한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점차 시국의 대세가 기울기 시작함에 따라 그 위험도 자연 해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피난소에 수용하였던 재류동포들도 모두 다 각각 자기들의 처소로 돌려보내서 비교적 안정되어있는 현상이외다."

"금후 또다시 그 무시무시한 포연탄우의 참극만 일어나지 아니하면 큰 위험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나 워낙 풍운험악한 시국이니 또 무슨 야단이 있을는지.. 그것을 누가 미리 단언하겠습니까."

"우리 부부가 이번에 돌아온 것은 순전한 피난이 아니라 일기도 몹시 덥고 또 북지풍운도 소란하여 너무 송구함으로 잠시 심신을 휴양하고자 돌아온 것이외다. 병원 기타 가지고 있었던 기관은 부리던 사람들에게 맡기는 동시에 대사관 경찰 당국에 보호를 의뢰하였으니 아무 염려 없을 것입니다. 북지 일대가 너무 소연하므로 충정낭식되어서 좀 안정된 후에 나 다시 북평으로 가려합니다."

"조선에 있는 동안에는 함흥부 황금정(咸興府黃金町) 나의 처가에 머물러 있을 예정인데 오늘 밤에나 내일 아침에는 떠나려 합니다."

하며 부부는 극히 공손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부부 서로 의탁하여 만리이역, 10년의 긴 세월을 보냈다』는 듯이 서로 쳐다보면서 다정스러운 웃음으로 말끝을 맺는다.

【동아일보 1937.08.18】


위 기사에 따르면 박봉남은 원래 계획했던 고향에서의 개업을 하지 않고 결혼 후 조선을 떠나 중국에서 개업했다. 10년 동안을 중국에 있었다면 동경에서 치과의전을 졸업하자마자 중국으로 간 것이니 행적이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도 치과의사 고준구라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김름이와 강흥숙에게 1호 여자 치과의사를 양보(?)한다 해도 박봉남은 한국사 '최초의 부부 치과의사'이자 또한 '최초로 부부가 함께 치과병원을 운영'한 기록의 소유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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