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제화공은 누구?

'제화공(製靴工)'이란 제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단어 의미 그대로는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보통 '구두 제작자'를 일컫는다.

최초로 어떠한 직업에 종사한 이를 찾는 경우, 박사라든가 전문직종은 논문 기록이나 면허 등록일로 비교적 쉽게 추적할 수 있지만 기능공과 같은 장인들은 정확한 시기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구두의 경우 국내에 들어온 시기가 근대 이후이고 제작이 이루어진 시기는 그보다 더 늦어졌다. 덕분에(?) 한국 최초의 제화공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근대의 제화공들은 교육을 받는 학교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화점에 직공으로 채용되어 도제형식(徒弟形式)으로 다년간 기능을 습득해 제화공이 되었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12일 자 기사에는 용산에 소재한 나가시마(中島)라는 일본인 소유의 제화점에 근무하던 '김성근(金聖根)'이라는 제화공의 인터뷰가 남아있다. 당시 48세로 을미년(1895년)부터 무려 32년간 제화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 한국 최초의 제화공 중 한명 김성근 【동아일보 1926.01.12】

그가 제화공이 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 군인들이 머리를 깎고 구두를 신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조진태(趙鎭泰, 1853~1933)와 백완혁(白完爀, 1856~1938)이 세운 군부피복회사에서는 대한제국 군경들의 피복을 제공하였는데, 이곳에 일본인 제화공이 채용되었고 그 아래에서 일하게 된 조선인 직공들이 '한국 최초의 제화공들'이다.

김성근은 이때 채용된 16~17명의 일원으로 함께 일했으며, 이들 중 본인과 남대문의 제화점에 근무하는 김경춘(金慶春)이라는 사람만이 1926년에도 30년이 넘게 여전히 제화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 1890년대 후반의 제화공 수입은 구두 한 켤레를 고치는데 엽전 다섯 냥(1926년 화폐로 환산하면 10전)으로 한 달에 500냥(10원) 정도 벌었다고 한다. 이는 1926년의 가치로 환산하면 80~100원 정도로 보수가 높은 편.

하지만 1926년에는 오히려 버는 액수가 절반 정도로 낮아진다. 그 이유는 초창기에는 군경 외에는 구두를 신는 사람이 없는, 구두 자체가 귀한 물건이라 고치거나 만드는 가격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불과 20년 만에 구두를 신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제화공들도 많아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성근은 1904년 조선호텔 앞에서 양화점을 개업해 7~8년간 운영하였는데 본인은 이를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개업한 양화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김성근의 착각으로 보인다. 1898년 한국 최초의 양화점을 이규익(李圭益)이 광화문 사거리에 개업하여 3~4년간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후 김성근은 양화점 운영에 실패하면서 다시 일본인 제화점의 직공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그는 관훈동에서 박덕유양화점(朴德裕洋靴店)을 운영하던 박덕유(朴德裕)나 청진동 경성양화점의 김종성(金鍾聲), 견지동 학우양화점 김재욱(金在旭), 종로 세창양화점 양세진(梁世鎭)만큼 이름을 남기거나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 '조선 양화계의 대왕'으로 불렸던 박덕유와 그의 양화점 광고

하지만 이들이 초창기 구두 고치는 직공에서 시작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업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동종업자로서 매우 감개무량한 태도를 인터뷰에서 드러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