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몰락한 조선귀족들의 실태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는데 큰 협력을 한 공신들은 일본 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朝鮮貴族)'이 되었다.

기고만장한 조선의 귀족들은 재산을 노름, 축첩, 유흥, 미두시장 등에 흥청망청 탕진하면서 극빈층으로 몰락하는 부류도 등장했다.

결국 일제는 자신들에게 협력한 귀족들이 파산해 비참한 생활을 하는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1927년 2월 10일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했다.


▲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과 신년하례식에 참석한 조선귀족들

이는 조선귀족들의 재산중 일부분의 매매를 금지하고 강제로 세습을 시행해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였다.

▲ 조선귀족의 생활상태 【중외일보 1927.02.12】

하지만 이 법에 해당되어 '세습재산으로 묶일 가산조차 이미 탕진'해버린 귀족들이 너무나 많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천만장자와 백만장자로 불리는 거부도 있었으나 문제되는 부류들은 거의 굶다시피 하는 참담한 '거지'와 같은 상황도 있었다.

당시 언론이 조사한 귀족 후작 7인, 백작 3인, 자작 18인, 남작 33인 등 총 61명 중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자는 고작 20여 명 정도였다.

이들 중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민영휘(閔泳徽, 1852~1935) 자작으로 부동산을 포함해 무려 1천만 원 이상의 재산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뒤를 이종건(李鍾健, 1843~1930) 남작과 이완용 후작의 장손 이병길(李丙吉, 1905~1950)이 1백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 민영휘(좌), 이병길(우)

반면 빚이 가장 많은 조선귀족은 윤택영(尹澤榮, 1876~1935) 후작으로 1백만 원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었으며, 송종헌(宋鍾憲, 1876~1949) 백작도 70만 원의 재산을 소유한 반면 부채도 그만큼을 안고 있었다. 또 이하영(李夏榮, 1858~1929) 자작도 재산 25만에 부채 25만 원으로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몰락한 조선귀족들 중 특히 성주경(成周絅, 1862~1938) 남작은 그날그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구걸을 하다시피 생활하고 있었으며, 장인원(張寅源, 1870~1949) 남작은 평안북도 창성군 군수로 근무하며 받은 봉급으로 겨우 생활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세습재산령이 제정되기 전에 이미 몰락해버린 조선귀족들이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자 보다 못한 조선총독부는 결국 '조선귀족구제안'을 실시해 각 조선귀족들에게 매월 150원의 품위유지비(?)를 지급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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