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머리 깎는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

'과거(科擧)'라 하면 봉건제도 아래에서 관리를 선발하던 시험을 말한다.

1924년 1월 25일 자 매일신보는 근래에 치러진 '과거'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그 시점이면 이미 일제시대인데 대체 무슨 과거시험을 치른다는 것이었을까.


이발자격증 취득을 위한 과거

 

보도된 내용은 '머리 깎는 사람을 선발하는 과거' 즉 '이발자격증 시험'을 뜻하는 것이었다. 비록 높은 벼슬을 하는 관리는 아니지만 시험을 통해 위생과에 등록이 되는 만큼 '과거'라는 익숙한 표현을 쓰기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

당시 시험에는 총 140명(조선인 112, 일본인 28)이 지원을 했는데, 이중에는 일본인 여성 4명도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모던걸들도 많았던 시기인만큼 여성 이발사와 보조원에 대한 수요도 매우 높아 '될 수 있는 대로 합격시킬 계획'을 천명하고 있을 정도였지만 응모한 조선인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이를 통해 여전히 조선인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낮고 여자가 기술을 배우는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 머리 깎아주는 사람들이 과거를 보아
- 여자도 네 명이 있다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에서는 23일부터 이발업자 시험을 시작하여 첫날에는 필기시험 합격자를 발표한 후 이에 합격된 자에게는 23일 오전 10시부터 실기시험과 구술시험을 행할 터인데, 이번 지원자 중에는 조선인이 112명이오 내지인이 28명으로 이중에는 내지인 여자도 4명이나 있었는데, 아직 묘령의 여자들로 필기시험의 성적은 양호한 편이오, 될 수 있는 대로 합격이 되게 할터이라더라.

【매일신보 1924.01.25】



단발령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업


이발사 자격시험은 위와 같이 1920년대가 초창기였지만 그 이전에도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는 물론 존재했다.

한일합방 바로 직전인 1909년 2월, 박창기(朴昌基)라는 이발사가 화개동(花開洞, 현 소격동)에 화개이발관(花開理髮舘)을개업했다.

당시 한성부는 동서, 서서, 남서, 북서의 4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북서 관내에는 이발소가 불과 8곳뿐이었을 정도로 블루오션이었다. 게다가 단발령(斷髮令)이 1895년에 공포되면서 가만히 있어도 손님이 넘쳐나는 황금기를 맞았다.

얼마나 장사가 잘되었는지를 수입을 통해 살펴보면, 박창기가 이발소를 차리는데 650냥(13원)의 밑천을 들였는데 개업 첫 달에는 2원 44전 5리에 그쳤지만, 3월에는 16원 64전, 4월에는 24원 80전을 벌어들였다. 즉 3월 한 달 수입만으로도 가게를 차리는데 드는 비용을 뽑고도 남은 것이었다.

▲ 1926년 박창기(47)와 그의 이발관. 현재의 이발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서비스를 제공하고도 억지로 단발을 하는 사람에게는 악마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개업 이후 4~5년간은 깎던 머리를 깎는 사람보다 생애 처음으로 단발을 하는 손님이 더 많았는데 이런 경우 분위기가 침울한 것은 당연했고, 억지로 친구들에게 끌려와 머리를 잘리는 경우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1920년까지도 한 달에 평균 7~8명이 생애 처음으로 단발을 하러 왔으며, 그의 손으로 단발을 해준 사람이 무려 2,500명. 이를 통해 오래 이어져온 관습을 철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드물게 있던 이발소는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종로에만 50곳이 생겨났고, 이발사 시험을 치르는 전문자격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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