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李月華)의 쓸쓸한 퇴장

1923년 상영된 무성영화 '월하의 맹서(月下의 盟誓)'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이월화(李月華, 1904~1933)는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의 여배우로 알려져 있다.

연극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영화계에 진출했고 '최초'라는 지위 때문에 크게 이름이 알려졌으나, 당시 여배우라는 직업의 불안정한 위치와 사생활 문제가 겹치면서 짧은 생을 살다 간 비운의 인물.

▲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무대 밖 이월화의 방황


1920년대 중후반, 이월화는 유명세를 이용해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인다.


그녀는 1926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가 열린 경복궁 경회루 연못 서편에 '대흥관(大興館)'이라는 바로크 양식의 서양 요리점을 개업하였다.

당대의 인기 여배우 이월화가 양식점을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청년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는데, '이월화'라는 이름 석자를 금박으로 새겨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 영어를 배우던 시기의 이월화

1927년경에는 '조선호텔을 자주 들락거리는 외국 배우들과 대화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태평동에 있던 일본 기독교청년회 영어 야학과를 다니기도 했는데, 기자가 왜 조선인들이 많은 '종로 청년회 영어과'에 다니지 않느냐고 하자 '남자들이 많이 알아보고 수작을 걸면 마음이 풀리기가 쉬워서'라고 대답하였다.

비록 척박한 초창기 영화계였으나 유명한만큼 알아보는 접근하는 남자들이 많았던 것 같고, 이로 인해 수난도 많이 겪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생이 된 이월화

 

이처럼 온전한 배우가 되지 못하고 방황하던 이월화는 여러 남자들과 동거를 하는가 하면, 이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도 하였으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 한복을 입은 이월화

그러다 어느 순간 '이월화가 조선권번의 기생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녀는 와룡동에 있는 자신의 기방을 찾아와 연유를 묻는 기자에게 '조선에 온전한 극단 하나만 있다면 내가 이런 기생 노릇을 하겠느냐'며 한탄을 하기도 했다.

"제가 기생으로 나온 것은 참으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서 나온 것이에요. 조선에 완전한 극단이라도 있어서 생활의 보장만 해준다면 누가 이런 기생질을 하겠어요.

한 달에 60원씩만 꼬박꼬박 주는 극단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뛰어나가겠어요.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려면 아무리 해도 돈이 드니까요. 그렇지만 그 노릇이 그렇게 어려워서 결국은 이런 기생 노릇까지 합니다 그려."

【조선일보 1928.01.05】



연이은 불행 끝에 마지막 결혼

 

20대 후반, 기생으로서도 활동할 나이가 넘어버린 이월화는 연극계로 복귀해 여성 배우들로 구성된 '오양 극단'을 설립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 영화 '뿔빠진 황소(1927)'에 출연한 이월화

그러나 극단 운영은 곧 경제적 난관에 부딪쳤고, 여성단원의 부모가 '이월화가 딸을 꼬드겨 데리고 가서 돌려주지 않는다'며 고소를 하는 등 일련의 사건으로 공연이 중지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오양극단은 실패하며 불행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몇 년간 댄서로 일하던 이월화는 부친은 중국인, 모친은 일본인인 혼혈청년 이춘래(李春來)와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을 맺고 수원에 수남포목상(水南布木商)을 차리고 새 출발을 시작했다.

▲ 종합예술협회 배우로 연극 '뺨 맞는 그 자식'에 출연할 당시의 이월화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은 최후의 행운이 아닌 불행의 시작이었다.

뒤늦게 두 사람의 결혼소식을 알게 된 남편의 가문은 부잣집이었던 반면, 이월화는 출생지와 부모,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불분명한 상황. 게다가 배우, 기생, 댄서 등을 전전한 그녀는 당연히 시댁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이 결혼만큼은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시부모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의 시댁 근처에 집 한 채를 얻어 이주하기에 이른다.


이월화의 미스터리한 최후

 

그런데 1933년 7월 17일 저녁, 갑작스럽게 이월화가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구(門司区) 사카에마치(榮町)의 시댁에서 돌연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담당의사에 따르면 사인은 심장마비. 건강상 별 문제가 없을 20대 여성에게 걸맞지 않은 상황이어서 '자살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 영화 '지나가의 비밀(1928)'의 한 장면. 이월화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이월화는 시댁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고, 친모인 줄 알았던 모친이 실은 계모인 데다가 성도 이(李)씨가 아니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녀는 일본으로 가기 전 친구들을 만날 때면 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세상을 비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월화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질만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세간의 의심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특히 사망 일주일 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힘들게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차도를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행동을 보면 정상적인 심리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연극배우 시절의 이월화

이월화가 활동하던 시기의 여배우는 기생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위였다. 그녀가 조금만 늦게 태어났다면 더 큰 명성을 쌓으며 활동할 수 있었을까. 조선영화의 여명기에 등장한 '최초의 여배우'는 그렇게 커튼만 살짝 젖힌 채로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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