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허무하게 죽은 왕비



태국을 근대화로 이끈 라마 5세 출랄롱코른(Chulalongkorn)대왕은 태국인들에게는 가장 존경하는 국왕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1868년부터 1910년까지 태국을 통치하며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조직을 개혁하고 부왕인 라마 4세가 맺었던 외세와의 불평등 조약들을 개정하였습니다
라마 5세의 이런 노력으로 대부분의 아시아국가들이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는 와중에도 태국은 주권을 지켜내고 자주개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출랄롱코른대왕(1853~1910)>


라마 5세 치세시절의 태국은 아시아국가 최초로 전기를 도입한 국가로 방콕의 거리에는 1894년부터 덴마크의 토목기술자 스벤 아게 웨스트우드(Svend Aage Westwood)와 방콕의 전기회사가 합작한 전차가 다녔습니다(대한제국은 1898년, 서울에 전차 개통)


<1906년 방콕의 전차모습과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전차 흔적>


특히 1871년, 라마 5세에 의해 타이 왕궁내에 설치된 왕립견습기사훈련소는 그의 이름을 따 1917년에 출랄롱코른대학교(Chulalongkorn University)로 공식 설립되며 동남아 최고의 명문대학이 되었습니다


<태국 최고의 명문대 출라대학의 교복과 엠블렘>



이처럼 존경받는 라마 5세에게는 많은 왕비와 궁녀가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만 4명의 왕비와 80여명의 자손을 둔 국왕은 그 중에서도 《쑤난타(Sunandha Kumariratana)라는 미모와 덕을 겸비한 왕비를 각별히 아꼈습니다

<맨 왼쪽이 쑤난타왕비, 2번째 왕비를 제외하면 모두 친자매입니다>


어느날, 왕족의 여름별궁인 방파인(Bang Pain)에 머물던 국왕은 왕비를 불렀고, 이에 쑤난타 왕비는 사랑하는 왕에게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인 짜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방파인 여름별궁과 짜오프라야강의 위치>


그런데 목적지인 방파인에 거의 다다랐을때, 갑자기 배가 흔들려 난간에 머물고 있던 왕비와 1살짜리 공주가 물에 빠지는 돌발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다지 깊은 물도 아니었고 주변에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별 것 아닌 사고였지만, 놀랍게도 그 누구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왕비와 공주를 구할 수 없었는데요
그 이유는 당시 태국에 있던 계급제도로 인해 어느 누구도 고귀한 왕족의 몸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숨걸고 왕비를 구조한다해도 감사는 커녕 죽음을 당할 판에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수천명의 사람들이 존경받는 왕비의 익사장면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880년 5월 31일, 수난타 왕비의 나이 19세때였으며 아기였던 공주는 물론, 임신 5개월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까지 포함하면 총 3명의 왕족이 사망했습니다

<쑤난타(1860~1880)왕비와 1살짜리 공주>


사랑하는 처자식의 사고사를 전해들은 국왕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것에 더욱 비통해했습니다
국왕은 왕비를 죽음으로 내몬 노예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왕비의 죽음은 어이없었지만, 그녀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후진적인 노예제도를 없애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라마 5세의 치적을 더욱 빛내게 되었습니다

<방파인 여름별궁의 쑤난타왕비 기념비>


쑤난타 왕비의 흔적은 라마 5세가 방파인 여름별궁에 세운 추모비와 쑤난타 왕비의 이름을 딴 쑤원 쑤난타 라차팟 대학(Suan Sunandha Rajabhat University)으로 현재까지도 태국인들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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