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의 날
- 타임캡슐/낡은 사진과 신문
- 2013. 12. 24. 07:00
힐튼 사이공, 베트남 포로 수용소 <1973년>
1973년 사이공거리
월남의 군사력은 양과 질에서 월맹을 압도하였지만, 끊임없이 반전시위가 이어졌고 사회지도층의 평화선동에 넘어가 적과 맞설 의지가 사라진 월남국민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1975년 4월 27일경, 사이공은 폭탄테러가 일어나는 등 어수선한 모습이었습니다.
베트콩이 발사한 로켓으로 파괴된 잔해에서 소지품을 찾고있는 사람들 <1975년 4월>
대공세를 앞두고 피난을 떠나는 사이공 시민들 <1975년 >
배에 탑승하는 피난행렬
헬기에 탑승하려는 피난민들
미국 대사관에 난입하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미군 <1975년>
대책없이 항구로 몰려드는 피난민들
평시에는 반미시위를 하던 시민들은 지옥이 다가오자 미 대사관으로 돌입하였습니다
탈출 대기중인 사이공 시민들
피난민 행렬을 보도하는 외신기자들
사람들은 패전이 가져다 줄 고통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탈출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탈출에 실패한 친미성향의 시민들과 정부관리들은 보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항공모함 갑판위의 CH-53 기동헬기 <1975년 4월>
피난민을 한명이라도 더 싣기위해 갑판에 실린 UH-1H 헬기를 바다에 버리는 모습
곧 다가올 지옥도 모른채 사이공으로 입성하는 월맹군과 베트콩을 환영하는 남아있는 시민들
열렬하게 적이었던 자들을 환영하는 사이공 시민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불타는 탱크
사이공거리로 입성하는 공산군들은 승리의 기쁨에도 엄격한 군기를 유지하고 일탈적인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군사력의 질과 양을 떠나 굶주린 늑대와 살찐 돼지에 비견되는 이 싸움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궁을 장악하고 있는 월맹군의 탱크
당일 새벽에야 주월 미 대사관직원들은 헬기를 이용해 부랴부랴 철수하였고, 몇시간 뒤 월남의 두옹 반 민 대통령은 베트콩 임시혁명정부 대표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무조건 항복하게 됩니다.
수도 방위작전의 임무를 받고 투입된 월남군인들은 대통령의 항복선언이 방송되자 무기를 공산군에게 넘기고 군복을 버리고 해산합니다.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탱크
월맹군의 선두 탱크가 대통령궁에 다다르자 보초병은 정문을 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탱크는 기다리지 않고 정문을 부수며 입성합니다.
공산군들이 '평화 해방일' 이라 명명한 이날, 평화적으로(?) 그들을 환영했던 사이공 시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들은 그야말로 진짜 전쟁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별다른 제지도 받지 않고 대통령군으로 진입하는 월맹군
독립궁을 장악한 공산군은 건물 전면에 적색과 청색의 바탕에 금색별이 박힌 베트콩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도배해버립니다.
일부 월남군의 산발적인 저항도 어둠이 찾아오며 잠잠해졌습니다.
공산군은 30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의 통금발표와 함께 월남의 헌법을 폐지하고 시민들의 출국을 금지하였으며, 경찰과 군인들의 무기를 회수하였습니다.
대통령궁에 주둔중인 월맹군 부대원들이 분수대에 손과 발을 씻고 있는 모습 <1975년 6월 2일>
체포된 월남군인들이 무장해제된 채로 대통령궁 뜰에 앉아있는 모습
일사분란하게 대통령궁으로 들어오는 월맹군 후속부대
사이공 거리에 널린 월남군 패잔병들이 버린 군복과 군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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