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서울대 이발소와 미장원의 '머리 쟁탈전'
- 타임캡슐/낡은 사진과 신문
- 2021. 2. 17. 10:48
타이틀이 '서울대의 머리 쟁탈전'이었다면 학업과 관련된 경쟁 스토리가 흘러나오겠지만 '이발소와 미장원'이란 문구로 머리카락을 놓고 영업전쟁이 벌어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기사다.
뜬금없이 학문의 전당인 대학교의 구내 편의시설에서 1995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 서울대 이발소-미장원 ‘머리 쟁탈전’
- 신세대 남학생들 미장원 몰리자
- 이웃 이발소, 미용사 고용-요금 내려
- 「손님」들 "서비스-값 경쟁 좋은 거죠"
서울대생들의「머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대 학생회관 지하에 나란히 붙어있는 이발소와 미장원.
이들은 학부생만 2만여 명에 이르는「초대형 머리 시장」을 두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고객 유치 경쟁에 나선 것.
「머리싸움」의 발단은 5년 전에 일어났다. 당시 서울대 여학생 및 여직원들을 주 고객으로 영업을 시작한 미용실에 신세대 남학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몇「튀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틈에 앉아 머리를 다듬었지만 요즘은 미용실 전체 고객의 70% 이상이 남성이다. 서울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서울대 미용실이「금녀지역」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
미용실 측은 남학생 손님 때문에 정작 여학생과 여직원이 잘 이용을 안 하게 되자 지난해 가을 급기야「남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입구에 내걸었다.
그러나 이 팻말은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미용실에 절대로 남자들 출입이 불가능한 줄 알고 있었던 남학생들이 오히려 몰려든 것. 미용실 측은 결국 지난달에 이 팻말을 다시 끌어내렸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자, 지난 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줄곧 독점지위를 누려왔던 이발소도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면도기로 옆머리를 바짝 밀고 무스로 잔뜩 멋을 내는 신세대 남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지난해 2명의 미용사를 자체적으로 고용했다. 또 미용실의 커트 요금보다 7백 원 정도 가격을 낮춰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 같은 이발소의 생존전략은 효력을 발휘, 줄어들던 남학생 고객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발소 측은 올해 미용사를 다시 5명으로 늘리고, 한쪽 벽면 거울에는 아예「미용실」이라는 팻말까지 붙여놓았다. 이발소 측은 "하루 2백여 명의 손님 중 70~80명은 미용사들 차지" 라며 "특히 대학교 1~2학년생들은 약 80%가 미용사를 찾는다"라고 말했다.
이발소의 역습(?)에 대해 미용실 측은 "서로 잘되는 것이 좋은 것 아니냐"며 아직은 워낙 수요가 많아 여유 있다는 반응. 그러나 미용실 측도 조만간 비장의 카드를 내놓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생들은 두 머릿방의 치열한 경쟁을 즐기고 있다. "서로 서비스 및 가격경쟁을 벌이면 소비자에겐 좋은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발소냐, 미용실이냐를 굳이 따지지 않아요. 자기 마음에 맞게 깎아주는 곳을 찾게 되는 거죠."
산뜻하게 머리를 손질하고 나온 한 공대생(21)의 신세대식「흑묘백묘론」이다.
《조선일보 1995.4.13》
● 이발소 몰락의 배경
사실 단순히 보면 대학생들을 놓고 벌이는 두 신구 업소의 별것 아닌 영업상황을 기자가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전략 싸움처럼 과장해서 쓴 기사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머리전쟁」에 당시 한국의 사회상이 녹아 있다.
장발 풍조가 한창이던 1975년, 정부는 미용실이 남성을 상대로 영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행정지도만 하던 것을 80년대 초반 여자들로부터 '남자들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다'는 신고가 쏟아지자 해당 미용실이 영업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성인 남자라면 이발소만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대 학생회관에 이발소가 생긴 것도 비슷한 시점인 1975년.
영원히 망할 걱정이 없을 것 같던 이발소였지만 남자들의 발길이 1991년 8월 22일, 2학기 개강일에 맞춰서 오픈한 서울대 구내 미용실로 몰리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점유율이 점차 낮아지자 급기야 이름에서 이발소를 뺀 ‘서울대 뉴 헤어’로 변경하고 미용사까지 고용한 것이 바로 1995년의「서울대 머리전쟁」시기이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학생들을 상대로 가격이 700원이나 저렴하면서도 미용실로 계속 손님을 빼앗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발소의 몰락은 바로 80년대 '불법 퇴폐이발소의 범람'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시내 이발소의 절반을 장악하고 주택가까지 침투한 퇴폐이발소에 엄마들이 어린 아들을 보내고 싶을 리가 없었다.
남자들의 미용실 출입제한을 놓고 오락가락하던 보사부(현 보건복지부)는 1983년「미용실에서는 남자들이 머리를 깎을 수 없고, 이발소에서는 파마를 하지 못한다」는 두 업계의 눈치를 보는 조정안을 내놓았는데, 다만 어린이들에게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때 엄마들의 손을 잡고 미용실을 드나든 남자 어린이들이 성인이 된 시기가 바로 90년대이다. 미용실의 인테리어와 여자미용사가 익숙한 이들에게는 아저씨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서울대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성균관대, 건국대, 한국외대 등도 구내 이발소에 여자미용사를 채용하기 시작했고, 이런 분위기는 일반업소로 확산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당시 퇴폐이발소는 말 그대로 사회악이었다. 불법 퇴폐이발소 업주가 구속되어 실형을 받는가 하면, 이용 가격은 1979년 당시 여성면도사에게 4~5만 원의 팁이 주어졌다. 이는 2021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8~30만 원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돈이다.
TV에서는 경찰에게 급습을 당한 퇴폐이발소의 밀실 영업과 성병(性病) 만연 실태, 어두침침한 조명, 야릇한 옷차림의 여성 면도사가 화면에 나오면서 대중들은「이발소」라는 이름에까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용업계를 위해 관계당국은 건전업소 인증제도를 시행하거나 하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어야 하지만 되려 이발소를 여자면도사를 둘 수 있는 성인전용업소와 청소년업소로 이원화해 운영할 수 있도록 보사부에 관계법규 개정을 건의한다.
이는 퇴폐영업을 허용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여론의 더 큰 반발을 샀고, 이미 안 좋아질 대로 안 좋아진 이발소의 이미지는 추락의 낭떠러지로 가는 길을 밟는다.
서울대학교의 머리 쟁탈전은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고 신세대 남학생들의 자연스러운 미용실 이용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울대 이발소는 손님 유치 싸움에서 밀리다가 2001년에는 학생회관 지하가 식당으로 개조되면서 후생관(현 아시아연구소) 3층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손님은 10%로 더욱 쪼그라들어버렸다. 2010년에는 후생관이 사라지면서 이발소는 ‘헤어클럽(현재 상호: 남자 만들기)’이란 이름으로 다시 학생회관 지하로 돌아왔다. 하지만 관련기사에 따르면 손님은 대부분 교직원과 교수들이고 학생은 별로 없다고 한다.
사실 1995년 서울대 머리전쟁은 두 업소의 전략과는 상관없이 사회풍조상 이미 정해진 수순으로 결국 미용실이 승리하는 결말이 예정된 셈이었다.
References:
- 조선일보. 서울대 이발소-미장원 머리 쟁탈전 (1995.4.13.) link
- 대학신문. 후생관 이발소 운영하는 김용주씨 인터뷰 (2005.11.19.) link
- 서울신문. 서울대 이발소 간판 ‘퇴출’ (1999.5.4.) link
- 서울대저널. 학생회관 지하 이발소, ‘헤어클럽’ (2014.9.7.) link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