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패의 신화' 메이웨더를 꺾은 유일한 복서

'세기의 대결'로 불리는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Floyd Mayweather Jr.)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의 웰터급 통합 타이틀전 날짜인 5월 3일 낮12시(한국시간)가 다가오면서 복싱팬들의 두근거림이 커지고 있다.


두 선수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쪽은 '말도 안되는' 8체급을 석권한 아시아의 자존심. 

그리고 다른 한쪽은 프로복서 데뷔 후 무패를 자랑하는 진행형 전설이다.

특히 메이웨더의 경우 '무패'라는 빛나는 타이틀 때문인지 아마추어시절 당했던 유일한 패배가 지금껏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무패의 복서 메이웨더를 꺾은 선수는 누구일까?



그 주인공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페더급 준결승에서 미국대표 메이웨더를 10-9 판정으로 누르고 은메달을 획득한 불가리아의 세라핌 토도로프(Serafim Todorov)이다.


세라핌 토도로프(Serafim Todorov)


판정시비가 있긴 하였지만 어쨌든 이 승리로 토도로프는 지금껏 '유일하게 메이웨더를 꺾은 복서'로 남아있다.

1969년생인 그는 현재 불가리아 남부에 있는 파자르지크라는 마을에서 거주중인데 안타깝게도 직장이 없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500유로(한화 약 60만원)의 실업수당을 받아 생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역 최고의 흥행메이커로 자리매김한 패배자(?) 메이웨더와는 대조적인 승자의 모습이다.


패자는 대전료 2억5천만 달러. 승자는 평면 TV조차 없다.


지금의 모습만을 보면 운좋게 메이웨더를 꺾은 것으로 유명세를 타는 듯 보이지만 토도로프는 사실 불가리아의 복싱영웅이다. 

불가리아에서는 매년 최고의 운동선수에게 '올해의 체육인'을 시상하는데, 그는 이 상을 2번(1991년, 1993년)이나 수상한 바 있다. 축구나 야구처럼 한 종목에서 MVP를 수상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종목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선수자리에 2번이나 올랐으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토도로프가 살고있는 아파트


두 선수의 운명이 갈린것은 1996년 올림픽 준결승전이 열렸던 조지아공대의 도핑 컨트롤 이었다.

이들은 경기 후 소변 샘플을 제출하기 위해 나란히 줄을서서 대기중이었는데 그 방에 프로모터들이 통역을 대동하고 토도로프에게 다가와 프로계약을 제의했다. 


프로모터들은 화려한 아마추어 경력에 기술적인 스타일, 그리고 백인복싱선수라는 토도로프의 상품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이전부터 꾸준히 프로전향제의를 받아오던 토도로프는 시큰둥했다. 

거액의 계약금과 저택, 차량등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외면한 그는 속으로 더 큰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우선 금메달을 딴 뒤 프로전향을 하지 않고 불가리아를 위해 계속 국가대항전을 뛴다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거라는 계산이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타지에서의 험난한 프로행보다는 이미 세계를 평정하고 있던 20대 후반의 복서에게 있어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프로모터들은 그의 뒤에 서있던 메이웨더에게 계약서를 들고갔다. 그들에게 차선이었던 메이웨더는 그후 누구나 알다시피 전설의 길을 걷는다.


결승은 태국대표 솜락 캄싱의 8-5 판정승


결승에서 태국의 솜락 캄싱(Somluck Kamsing) 만난 토도로프는 생각치도 못한 패배를 당한다(태국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 홈보이 메이웨더를 꺾은 시점에서 자신이 100% 금메달을 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독이 된 것이었다.


불가리아 정부 역시 '당연한' 금메달을 따지못한 토도로프를 외면했고 망연자실한 그는 술에 빠져들었다. 이후 1997년 세계선수권에는 터키 정부로부터 거액의 귀화제의를 받기도 하였으나 불가리아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어느 국가를 위해서도 싸울 수 없게 된 그는 결국 28세의 나이에 복싱글러브를 벗었다.


당시 동유럽은 공산주의의 몰락이후 시장경제로의 전환시기였다. 불가리아 역시 경제적 어려움 속에 있었고 복싱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던 토도로프는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소시지공장 직원, 식료품가게 점원, 버스기사등의 직업을 전전하였고 아내 역시 슈퍼마켓에서 일해야했다. 급기야 마약딜러와 범죄조직들은 복싱선수였던 그에게 보디가드를 제의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돈이 급했지만 세계 최고 복서로서의 자존심은 남아있었던 토도로프는 이를 거절했다.


현재의 토도로프 


인생에서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설때가 있다.

토도로프 역시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당시 찾아왔던 프로모터들과 계약을 했을거라고 한다.

프로복서가 되기에 더할 나위없는 곳이 미국이고 그 순간이 인생의 정점이란걸 알았다면 틀림없이 그랬겠지만 100% 금메달을 확신하던 상황에서는 몇번이고 시간을 돌려도 선택은 같을 것이다.


이처럼 한때 국가의 영웅이었지만 궁핍한 삶을 살아가는 불운한 복서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불가리아 흑해 연안 도시 부르가스의 시장이 토도로프의 이름을 내건 복싱체육관을 열어 주기로하며 다시한번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무패의 복서를 이긴 댓가치고는 초라하지만 복싱계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니 어쨌든 메이웨더를 이긴 덕을 지금까지도 받는 셈이다.


그는 두 전설의 대결에 대해 메이웨더가 무패로 남아있기를 염원했다. 그래야 본인이 '유일하게 메이웨더를 이긴 복서'로 남을 수 있다는게 그 이유다.



한편, 세라핌 토도로프는 한국과는 악연이 있는 선수.


그의 첫번째 올림픽이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 플라이급 8강전에서는 한국의 김광선 선수(금메달)를 만나 패배하였다. 그리고 두번째 올림픽이었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밴텀급에서는 북한의 리광식 선수(동메달)를 만나 역시 8강전에서 패배하였다.


무패복서 메이웨더를 이긴 유일한 복서를 이긴 선수 '김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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